top of page
 Review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마치)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1)
박수지

*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비평글

한 사람의 현재를 대면하는 일은 잦은 듯하면서도 드물다. 이는 또한 논리적이지 않을 그의 탄생, 그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마저 포함된 그의 삶, 내게 편향적인 파편으로 남은 그에 관한 기억, 나를 포함한 누군가들의 삶에 있게 될 그의 부재 등을 동시에 떠올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차지량이라는 한 개인의 작업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한 사람의 가장 꾸밈없는 현재를 대면하는 느낌을 준다. 그는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내밀함을 공공연히 펼쳐 보이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내밀함은 여럿의 개인에게 가장 깊이 침잠해 있는 보편으로, 보는 자는 한 개인의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자신의 시간과 함께 썰물처럼 쓸려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시간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아주 동등하게 섞여 망망대해를 떠돌다 이따금 윤슬을 비추는 물결이 된다. 그리고 물결은 때때로 누군가의 발등에 잠시 정박했다가 다시 그의 시간을 데리고 간다.

 

차지량은 언제나 정주와 이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종류의 집을 가져왔다. 그것은 집이 있음으로 인한 안정 혹은 없음으로 인한 불안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박탈감, 삶의 권리와 조건에 관한 논의와도 다르다. 한동안 그에게 집은 생겨나는 장소이며 떠남을 방증하는 장소였고, 그는 끝내 집으로-자신에게-돌아온다. 자신이 돌아온 곳에서-자신에게서-그는 고향을 발견한다. 때문에 그와 집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탄생에 관해 들여다봐야 한다. 그는 위계를 학습한 경험이 없다. 이것은 운 좋은 일이면서 운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닌데, 그가 주변에 위계가 팽배한 상황에서조차 위계에 영향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학습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스템의 껍질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때 껍질을 감지하는 자는 ‘개인’이 된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껍질 바깥으로의 떠남을 시도한다. 그의 껍질은 찢어지지 않고 깨어진다. 깨어진 그것은 여러 조각이 되어 2012년까지 그가 선보였던 작업으로 남았다.

 

2012년 차지량은 자신의 물리적인 떠남을 도모한다. 껍질 바깥에서 가장 자유로운 상태로 삶의 종결을 희망했을 때 그는 오히려 춤을 춘다. 그때 무언가가 그 즉시 ‘집’으로 돌아왔고, 그는 새삼 자신의 집에 현관문이 없었으며 사람들을 초대할 수많은 방과 드넓은 거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마치 한 번도 편지를 써본 적이 없던 사람처럼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편지에는 매번 구체적인 수신인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누군가 만을 위해 쓰인 적은 없다. 그 편지는 수신인을 포함해, 그가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면 쓰이거나 보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편지를 보내며 그는 2012년에 시작된 ‘춤’을 연이어 춘다. 춤은 낙하하기 전 허공으로 유영하듯 떠오르는 것이다. 춤은 입었던 외투를 벗는 것이다. 춤은 피부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춤은 볼륨으로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차지량은 ‘집’에서 ‘춤’을 추는 개인이다. 그는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모든 것을 그의 포즈와 호흡, 속도와 볼륨으로 여럿의 타인과 나눈다. 그가 춤을 출 때, 피아노는 제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피부를 가진 타악기이다. 그것은 심지어 더 이상 피아노로 불릴 필요조차 없다. 그가 춤을 출 때, 소리는 과녁 뒤로 휘어 집 밖으로 새어 나가는 주파수다. 춤이 있는 그의 집에서 여럿의 타인이 자신의 주파수를 집과 동기화할 때까지, 그들은 자신이 동기화를 이토록 원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눈으로 듣고 귀로 말하게 된다. 그의 집에서 나갈 때 몇몇은 그 즉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몇몇은 자신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껍질로 들어가는 것인지 의심한다. 몇몇은 집을 떠날지 고민한다. 몇몇은 그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또 몇몇은 멈춰 보기로 결심한다.

 

이제 차지량의 ‘집’은 초개인적이면서 초공공적인 모든 장소다. 발생한 집은 장소이면서 시간이다. 때문에 집은 사라지기도, 커지기도, 반복되기도, 돌아오기도 한다. 그는 모든 곳/때에서 모든 개인을 반긴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연주한다. 모든 것을 마주할 때, 그는 꾸면서 깬다. 그는 멈추면서 춘다. ‘모든’ 은 사실 자유다. ‘모든’은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할 때 ‘모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만드는 일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모든’은 투명할 정도로 개인적인 것을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을 통해 차지량은 아무것도 도구화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다.어느 시점까지 그에게 있어 자유는 깊이 갈망하는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에게 있어 자유는 목적을, 과녁을, 시스템을 잊는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곳에서 즉시 직시하는 법을 익힌다. 직시할 때만 볼 수 있는 심연과 환상은 더 이상 현실의 이미지와도 위계가 없다.

 

이제 껍질을 통해 안과 밖을 구분하는 일 또한 기분 좋게 무효화 된다. 껍질은 자유 안에서 녹는 성질을 지녔다. 자유는 은둔하지 않으며, 자유는 떠나지 않는다. 자유는 오히려 머문다. 자유는 초대받은 자가 초대하는 자를 초대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머물 자리를 낸다. 자유에 관해서라면 개인은 하나의 사람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자유 안에서 개인은 타인이다. 불현듯 예술은 예술을 잊었을 때 알게 되는 것임을 잠시 깨닫는다.

 

1)

차지량,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2012.12.20-2019.12.20, 다채널 영상 설치, 43분. 
차지량,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2024, 다채널 영상 설치, 가변크기.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