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고민하는 젊은 작가 차지량과의 만남, 헤드에이크
독립적인 개인
‘독립’은 20대에게 가깝고도 먼 단어다. 헤드에이크는 차지량 작가의 <세대독립클럽>을 소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한다. 프로젝트의 사진과 텍스트를 보면서 기존에 20대를 찌질하게만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20대가 또래를 바라보고 위로하는 동료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프로젝트같아 흥미로웠다. 오늘은 프로젝트 탄생 배경, 진행 중 힘들었던 것,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듣고자 한다.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또래와 사회를 고민하는 작가 차지량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Headache
Cha Ji Ryang
H 20대로서 느끼는 독립이란 어떤가?
C 독립은 사고의 방식이다. 현실의 생활패턴과 밀접하다. 많은 20대가 기존질서에 기대는 경향이 있는것 같다.
H 작가님은 독립하셨는지?
C (경제적 독립을 말하는 거라면) 독립했다. 그 밖에 독립적 제스처를 좋아한다. 시스템화 되지 않은 것들 주로 선택했던 것 같다. 경제적 독립을 하고 있지만 이것저것 소비할 때에는 대중적 질서들이 있지 않나. 거기에서 피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어 알뜰하게 살고 있다.
H 대중적 질서를 피하는 선택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C 자립형이다. 자체 생산과 이미 생산된것의 스스로의 재공정을 희망한다. 기업과 대중은 신상품을 끊임없이 생산 소비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부분에 소비욕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세대독립클럽
H <세대독립클럽>은 언제부터 진행했나?
C 세대라는 말 자체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내 주변 친구들 이라는 말, 나를 포함한 공통적인 공기들과 그에 따른 고민들이 관심사였다. 그런 것들이 기성세대 안의 질서들로 포장, 정리 된 과정들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것이 출발점이었다.
H 그런 것들이란 88만원세대랄지, 20대를 향한 사회의 시선과 정황들을 말하는 것인가?
C 그렇다. 경제학자가 내세우는 정의 때문에 또래가 경제적인 기준에 더 집중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정 수준의 수입 이상만을 지향하는 세대가 된 것 같아 스스로를 값으로 매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상황의 정의에 동의할 수 없었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성향을 한번에 묶어버린 것 같아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각 개인의 실질적인 성향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작업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20대의 친구들이 각자 발견한 <세대>란 키워드를 가지고 작업하고 기획하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H 헤드에이크 팀도 친구들과 ‘88만원세대’란 명명에 자극받아서 더 열심히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라벨링은, 사회를 환기시킴으로써 자기 몫을 충분히 했다. 문제는 88만원만큼 힘을 갖는 라벨링도 없다는 점인 것 같다. 나이대가 20대라는 거 외에는 이 다양한 사람들을 명명할 만큼 공통적인 부분을 찾기 힘든 것 같다.
C 88만원세대엔 경제적 수치가 있다. 그걸 우리가 너무 자극적이고 빠르게 흡수하는 것 같다. 기성세대에겐 이 이름이 더없이 확 들어온다. ‘이 정도월급이면 어느 정도 생활권 되겠네?’ 처럼. 우리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세대를 온전하게 설명 할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더 답답했다. 동세대들이 88만원세대라는 명칭에 삐지기도 했지만 체념도 많았다.
H 나는 사실 체념한 편에 속한다. 내 월급 83만원. 체념이라기보다 달관했다고나 할까. 사실 80만원이 넘느냐 안 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C 이게 우리가 88만원이라는 정의에 매여 있다는 증거다. 사실 돈을 벌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질서를 세우고 생활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데 ‘아 내가 88만원밖에 못 벌어? 난 안돼.’ 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도 그렇고, 학습된 기준을 따라 가려고 하는 부분들이 여전히 계속되는 거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과는 다른 다양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세대독립클럽의 목표였다.
H 작가님도 세대라기보다 친구, 동료와 같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뮤니케이션이 발전해서 세대독립클럽으로 확장된 것 아닌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나?
C 처음에는 지인들에서부터 지인의 지인, 워낙에 온라인이 익숙하니까 불특정 다수도 그것들을 흡수하고 인식하는 게 빨랐다. 처음에는 반 정도가 지인이었다. 캐스팅 매니저도 있었다. 김꽃비(영화배우)라고, 지인 중에 가장 유명하고 성격이 활발한 사람이었다. 그 친구가 인원 반을 끌어왔다. 그리고 공식 공지를 통해 불특정 인물의 반 정도를 모았고.
다른 전시를 할 때도 이런 방식으로 홍보하고 온라인에 올려서 2월 첫번째 번개(오프라인:자체발광)에는 50~60명 정도가 모였다. 이후 9월 <미드나잇 퍼레이드>에는 70~80명 참여했다. 목표수치가 있었던 건 아니고 처음엔 몇 명이 모일지 궁금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모여 즐거웠다. 방식은 구체적 대화나 소통의 제스처라기보다 이미지화된 제스처였다. 오브제별로 대화하는 방식. 처음엔 소통하지 않다가 서로가 신호를 보낸 이후 오브제를 교환하고 그 공간을 스스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
그것들의 과정을 담은 전시장 한쪽에서는 세대 안에서 발견했던 극단적 성향들의 에피소드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기성세대들 안에서의 질서이기도 할텐데, 전체주의적 캐릭터(촛불남)와 개인주의적 캐릭터(야광녀)가 상황을 구현하고 그들의 공통성향을 은둔적인 질서로 표현했던 작업들이 있었다. 전시장에서 그러한 현장의 영상들이 돌아가고 <은둔하는 세대의 디지털캠프파이어>(설치물)에 둘러 앉는다.
오프라인 자체발광
H 프로젝트 때 교환했던 오브제가 야광봉인가?
C 야광봉을 프로젝트 때마다 썼다. 야광봉은 일시적인 환호와 응원의 도구이며 지속되는 시간이 3~4시간정도인데 하룻밤 같은, 일시적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다.
첫 번개에서는 일부러 촛불과 야광봉을 충돌시켰다. 상징화된 어떤 연대감으로서 이어질 수 있는 의식을 진행하고 다른 오브제를 개입시켜 클럽이나 축제의 분위기로 공간의 성질을 환기시키는 연출을 했다.
H 프로젝트에 쓴 ‘여름밤이 지나가고 있다~’ 로 시작되는 글을 보면서 이 프로젝트가 이름이 <세대독립클럽> 이긴 하지만 사실 세대 문제 이 전에 개인이 먼저 성립되어야 세대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C 공지에 대한 무차별적인 확산으로 인해 불특정다수의 개인들이 모였다. 여름에 진행한 <미드나잇 퍼레이드>의 경우는 진행을 함께할 사람을 모집해야만 했다. ‘세대독립클럽’ 커뮤니티에서 공지를 통해 모집이 이루어졌다. 역할분배가 있어야 할 것 같았고, 사람들과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상상했다. 커뮤니티 내부 소통과 회의를 통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고, 의견은 현장에서 실행되었다. 결과적으로 <미드나잇 퍼레이드> 당일, 경찰서에도 끌려가는 일도 있었지만,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 많아 굉장히 재밌었다.
H <미드나잇 퍼레이드>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나?
C 사람들과 자정에 공지된 장소(유흥지역의 조망권이 확보된 옥상)에 모여 공통의 시간(새벽)을 보내자는 얘기를 한다. 그 때 그룹핑(GROUPING)을 하게 되는데, 도시의 또 다른 유흥지역으로 이동한 뒤에 비 활성화된 지역을 찾아낸다. 그 곳에서 시각적으로 유흥지역을 경험하고 빛나지 않은 곳,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발광형 오브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는 것들이 공통의 목표였다. 이런 목표에 대한 공지 후, 참가자에게 활동을 지원하는 지원금 88만원이 공동으로 분배된다. 이것은 일종의 한탕주의의 성질을 포함한다. (88만원세대로 정의 된 금액을 하루 만에 써버리자.) 몇 명이 되든 1/N로 나눠가지고, 써도 되고 안 써도 되고 나눠 갖는 것에 포커스를 둔 부분이다. 그래서 밤을 샌 사람도 있고, 당일에 간 사람도 있었다. 같은 그룹이 된 사람들끼리 거기서 나눈 행동과 이야기들은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H <미드나잇 퍼레이드>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정전 된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친구를 만나러. 어두운 가운데 저 멀리 아파트 불빛만 보였다. 밝은데 있다가 어두운 그 곳에 가니 느낌이 새로웠다.
C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옥상에서 모였던 이유는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때 인식되는 도시의 시각화된 부분들이 있었다. 홍대서 모였던 이유는 그런 부분에서 젊은이들의 분위기는 흡수할 수도 있었지만 굉장히 밝고(활성화된 유흥지역) 어두운 부분(비 활성화된 지역)이 확실하게 보이는 옥상(조망권지역)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고 실제로 그 활성화된 공간과 비 활성화된 공간을 모두 지나칠 때 발광하는 오브제를 갖고 퍼레이드가 이루어진다. 활성화된 화려한 곳에서는 지참한 발광형 오브제들의 빛이 드러나지 않지만, 비 활성화된 공간에선 그것들이 선명해지는 상황을 참가자 스스로 경험하게 했다. 마치 밀집된 상황과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유독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과열된 빛에 흡수되고 더 빛나길 욕망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아주 약한 불빛처럼 보이더라도 어떤 자기의 독립적 공간 안에서는 발광할 수 있다는 이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H 20대는 각자 각계의 전투를 벌이는데 힘을 합치면, 정치적 힘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자기의 프로젝트에 탄력을 받지 않을까. <세대독립클럽>도 각각의 멤버십(강한연대)을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가 고민이었을 것 같다. 특히 20대들의 공통 관심사나 고민에 대해 연대를 모색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것은 헤드에이크의 고민이기도 하다.
C 20대는 체력, 자본, 시간의 부족함에 허덕인다. 그럼에도 생성되는 끊임없는 욕망. 각자의 성향은 개성적으로 존재하지만 인식-소통되진 못한다. 통로에 대한 각자의 욕망은 있지만 그려나가는 완성체는 저마다 다르다. 개인의 의견이 공통의 의견으로서 정의되는 게 좋은 것일까? 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그래서 ‘공통으로 묶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서로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는 요소들도 중요하다. 대화할 수 있다는 것에 희망하고 이들이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싶진 않다. 다양한 이야기(샘플)을 희망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접근은 관찰과 제안의 성격을 띈 미술적 제스처이다.
H 그러한 미술적인 제스처 덕분에, 강요하고 싶지 않지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 않나?
C 관심 좋다. 그래서 네트워킹이 중요한 것 같다. 지속가능이라면 더 좋겠다.
H 세대독립클럽은 지속가능한 네트워킹이라고 생각하나?
C 언제든 뭉쳤다 흩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속하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이뤄져도 되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획을 ‘세대독립클럽’이 중심이 되어 제안하는 정도지만, 커뮤니티 내부에서 영향을 받아서 불특정 개인이 또 다른 개인 혹은 커뮤니티 전체에 다른 제안이 발생할수 있다는 가능성이 중요하다. 이게 지속의 의미인 것 같다. 산업이 개입된 장르에서는 시장에서의 생존이 떠오르는데, 세대독립클럽은 그런면에서 세대간 관심의 활성화가 생존 키워드 같다.
학돗네
C <세대독립클럽>은 2010년 초점을 맞춘 일정의 제목일 뿐, 이 형태대로 유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 10월에 있었던 전시 <학돗네>는 담론을 나눌 수 있는 뒤풀이의 의미라고 보면 되겠다. 떠나고 난 흔적이랄까. 돗자리라는 오브제. 9월의 <미드나잇 퍼레이드>전시 오픈 전 날, 친구 세 명이서 비어있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을 때 발견했다. 다 놀고 돗자리를 가져가는 찰나에 돗자리로 그냥 학을 접어봤다. 그 순간 ‘아, 이런 거였나?’ 하고 서로가 눈빛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을 덩그러니 그 운동장에 놓고 왔다. <학돗네>에 초대한 사람들은 세대독립클럽에 참여한 같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퍼포먼스를 한강에서 다시 해보았다. 우리가 함께 했던 공간에 일시적이고 연약한. 그리고 바람이 담긴, 흔적을 남기고 돌아오는 제스처를 취했던 거다.
H <학돗네>의 탄생배경을 듣고 나니 더 공감이 된다. <이동을 위한 회화>때부터 솔직히 작가님의 작품이 귀엽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세대독립클럽>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차가운 도시의 느낌이지만 프로제트 의도나 기획이 많은 것으로부터 소외된 20대의 모습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면, <학돗네>는 탄생배경을 듣고 보니 역시 친구들과 또래를 위로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학을 접을 때 기념적인 행사를 했나? 학을 접을 땐 염원이 담기잖나.
C 그걸 생각하고 나중에 더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돗네>를 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뭔가 많은 사람들과 공통의 염원들이 있다면, 개인의 염원이 공통의 염원으로 보이는 제스처가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학을 열 마리 접으면 백 마리 접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인으로써 한 명의 제스처라도 여러 가지의 연결 될 수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이 있다. 염원과 그 염원에 대한 제스처.
H 설명을 들을수록 <학돗네>가 더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큰 학에 불과한 건가 싶었는데 학을 보면 확실히 어떤 마음을 해소시켜준다. 세대독립클럽이 풀지 못한, 미결된 부분이 학이 해소해 준 걸까.
C 나 자신도 그 부분이 좋았다. 예를 들어 맘에 들지 않는 기사 보고 ‘에이씨’라는 댓글. 혹은 쥐20행사에서 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개입의 제스처 인 것 같다. 훼손되지 않는, 일회적이고 연약한 개입이란 생각을 했다. 그것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실질적인 공간에서 스케일이 커지고, 스펙터클해지는 것보다 연결가능하고 다른 부분들로 연상되는 것들에 대한 제스처가 나의 관심사다. <미드나잇퍼레이드>도 공통적 성향의 공간이 또 다른 공간에서 확장될 수 있다는 암시가 되고 있다. ‘학돗네’도 다른 연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H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
C 우연히 강남지역에 산지 3년 반이 넘었는데, 지내면서 기획했던 것들이 있다. 이 지역을 이용한 작업인데 준비를 오래했다. 이 곳은 문화적인 것을 생성시키기에 열악하면서 미학적 고집이 견고한 지역이다. 실제적인 사용자, 지나치는 자, 공간의 개입자들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따른 작업을 하고자한다.
세대독립클럽에서도 이미 그런 것들을 체험했다. 그런 면에서 문화운동의 제스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개인의 갈증이 있는 이곳에서 독립적일 수 있는 시공간, 자본에 메이지 않고 탄생시키고자 하는 부분들이 있다.
H 나는 단순히 잠재된 참여자로서 <세대독립클럽>은 약간 문턱이 있는 듯 느껴졌다. 다들 아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에 진행될 것들에는 더 쉽게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생긴다.
C 지속적으로 희망하는 방식은 공지를 통해 불특정다수와 함께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추가적으로 흥미가 있는 부분들이 서로 연결되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봤을 때 대상은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가? 또 이것들이 다채널로 존재했을 때와 다른 것들과 섞여있을 때는 사람들은 무엇을 연상하고 해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H 그런 것들이 이미 지금도 모르는 사이 작품의 영향은 곳곳에 퍼져있을 것이다.
C 작품과 전시에 대한 반응들이 많지 않더라도 관객의 반응에 매우 만족한다.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H 헤드에이크 독자들이나 우리 편집진에게 작가님이 궁금하신 점 있나?
C ‘세대’라는 문제적 인식으로써 키워드를 사용하며 특별히 특정한 무언가를 소비하거나 다른 문화를 만들게 되나? 문화소비의 경우, 문화적으로 체념했던 세대들이 성장할 경우 어떤 식으로 문화를 만들어가고 소비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
H 소규모 네트워킹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확실히 20대의 문화는 이미지화 되는 것들이 많다. 대중/문화의 기호를 흡수할 때 서로를 흡수하고 싶어 한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힘의 실체는 뭘까 궁금하다. 또 다른 한편, 자기만 갖고 싶어 하는 취향의 욕구도 존재하고. 자기만의 개성을 원하면서도 유행을 따르는 이상한 현상이 공존한다.
C 자기안의 질서가 있고 커뮤니케이션 되어야 한다.
H 스마트 폰이 그런 것 같다. 나중엔 무섭더라. 지하철 안에서 7명 중 5명이 스마트 폰을 보며 무언가 하는 걸 보고 자기안의 질서의 선택보다 스마트 폰의 질서를 따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것들의 매력은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 아닐까. 소유함으로서 갖게 되는 자신의 지위랄까?
C 그건 일종의 오프라인에서 충족되지 않는 연대감이 스마트한 온라인 세계관으로 충족시켜주는 것 같다. 이미지로 권력이 분배 되거나 그 질서를 따라갈 수 없으면 뒤쳐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 또한 최근에 스마트 폰을 쓰기 시작했다. 기능면에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면에서 만족하는 편이다고. 하지만 20대의 문화가 스마트 폰을 사느냐 안 사느냐에 따라서 형성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안타깝다. 결국 문화생산의 근원지가 기업이 되는 게 슬프다. 작가로서 가급적이면 예술적인 제안들이 문화 생산의 근원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