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 Video / 60min / 2021
‘STAY’는 10년 전, 주거정책에 관여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주거공간을 점유하여 새로운 집을 모색하는 프로젝트인 ‘New Home’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답장으로 이루어진 영상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Watch & Chill》 온/오프라인 전시에 ‘New Home’과 함께 전시, 상영되었다. 2021년의 여름,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과 앞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함께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 중얼거리며 상상하는 ‘없는 고향’을 만드는 일이었다. 집이라는 틀을 벗어난 철새들과 그들 방식대로 영혼을 모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했다.
Director: Cha Ji Ryang
Stories: Yeon Park, Bebe, Hankyul, Sosung, Jongcheol, Taehyun Kwon,
Sueyen Bak, Hao Kwak, N'Ouir, Soohwan Kim
Answers: tofu keem, Ivetta Sunyoung Kang, Fairy, ijo, goyoson, HNV, Joreng Jung
Translate: Eunhae Kim
Sound and Video Environment Settings: Soft Company
Furniture Design: U malong
Photography: Yohan Kim
Partners: MMCA, The Wave Company
*그리고 온라인 상영을 시작하며 사람들에게 짧은 글을 의뢰했다.
흐린 날 미사일 _ 조재연
나는 문득 자수를 하고 싶어진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장마철마다 대야와 바가지로 물을 푸던 양친을 잊고 지냄에 대하여, 익지도 않은 낯선 짐승을 뼈째로 허겁지겁 삼키고는 그 비가 타고 내려오던 깊은 계단에 게워냈던 기억의 부재에 대하여, 새벽 내 심장 타는 냄새를 맡던 가족의 얼굴을 모름에 대하여, 그러니까 그 어느 것도 내가 머물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지. 쥐기 위해서 꺾어야 한다는 것과,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만은 가구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는 태도가 사실 끔찍하게 다르다 것이 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누군가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스스로 생성해내는 생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밤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오일 대신 유채라 발음하고, 시침은 물론 형광등이 씨끄럽다는 것을 앎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소한 소리들을 말미암아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길마저 망각할 수밖에.
차지량의 〈New Home〉에 놓인 행렬과 무도회는 집을 소유하기 위한 자리이거나 집을 소유하지 못한 울화에 대한 가시화라지만, 그보다 '집을 잃기 위해서'라는 목적어를 먼저 떠올린다면 잘못된 것일까. 〈Stay〉 속 주영이 "작은 집도 집이지"라며 한결의 말에 마지못해 똑같은 문장으로 시인할 때, 김소성이 "여기서 지금 희망을 찾기는 너무 힘들고 지금은. 그래서 (…) 세상이랑 싸우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라고 말하거나 "지금은 이제 그런 에너지가 전혀 없고 저 안에 있는 나를 보면 슬프죠. 엄청"이라 고백할 때, 또 이를 이어받듯 권태현이 "구조의 무서운 점은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안쪽에 어떤 방식으로든 (…) 안착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이 바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쪽의 논리를 생산하게 되는"이라고 말할 때, 식은 이 말들을 생기 넘치는 이전의 몸짓에 대조하게 된다. 소원되는 집과 배반을 부추기는 집. 일련의 서사엔 두 개의 집이 나온다. 그러나 선택할 필요는 없다. 서사는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두 영상은 '집이 있다면 어떤 것이 좋을 텐데'라는 식으로 제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집이 없어 어떤 것이 좋지 않다'라는 서술 또한 함구된다. 외려 누렸던 기쁨은 집 없어 나온 이들이 밤,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낼 때였다. 걸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토지로 행렬이 지나갈 때, 연주에 종사하지 않는 벽에 소리가 반향될 때, 수면과 불화하는 찬 바닥이 동침과 어울릴 때 '집'의 개념 또한 지난 질서의 것과 같지 않아진다. '새로운 집'은 소유와 결부되지 않는다. 행렬, 무도, 동침, 세 행위는 집을 집이 아닌 곳으로 만들고, 집이 아닌 곳을 집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집의 개념은 남루하게 되었다. 행위들이 '집의 소거'로 의미 지어진다면 모두 그 때문이다. 소유란 노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의 결과가 아닌 토지가 거래 없이 공동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지난 논리는 여기서 비로소 쓰이지 않는다. 작업은 더 불가능한 곳으로 내려갔다. 이베타가 말했듯 "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공통분모는 우린 정착되지 않았고, 정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작업은 소원을 무릅쓰고 집을 소거하려 한다.
마지막에 배치된 〈Home Again〉은 그 소거의 가시화다. 소원되는 집과 배반을 부추기는 집이 노이즈로써 동시에 지워진다. 행렬과 무도, 동침의 내역까지 지워버리는 것으로써, 작업은 그것을 추억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으려 한다. 추억할 대상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그러나 다시, 혹은 처음으로 집을 잃기 위해선 얼마간 소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작업은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낙관하지 않는다. 저들이 고백한 것처럼 나도 고백을 해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지만 더 좋은 곳을 소유하고 싶다. 허튼 소리를 지껄인 것일까. 내가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예술 개념을 갖고 있었던가. 그러나 작업이 더 불가능한 곳으로 내려가듯 또 예술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 없음으로써 가담하듯 믿지 않으면서, 나는 쓴다. 세상이 간단치 않다면 기꺼이 토푸킴의 말처럼 집을 향해 "우리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쪽으로 걷게 될 것이다. 흐린 날 미사일처럼,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
*건축주 꿈나무인 김맑음은 영상을 보고 새로운 세대로서 열망이 담긴 짧은 소설을 보내주었다.
“박해천 『아파트 게임』(2013) 후반부에 보면 한 강연 내용이 나오는데요.
책 안의 강연장에 있었던 A를 상정해서, 그 A가 강연 중간에 나오는 것에서 시작해보았어요.
그 이후에 이래저래 방을 찾고 그곳에 누워서 했던 생각을 C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내는 글이랍니다.”
Dear C _ 김맑음
몇 년 전에 들었던 한 강연에서부터 편지를 시작해볼까 해요. 2013년 대학생이었던 저는 “방의 평등주의 실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년 개최되어 온 한 박람회를 가게 되었어요. 무테안경을 쓴 강연자가 부대기념행사로 ‘지상의 방 한 칸’이라는 강연을 했었어요. 아마 박씨였던 것 같은데, 디자인 연구자라는 그 직함이 주는 믿음직스러움 덕분에 경청하게 되었어요.
집 없는 청년들을 위한 방을 큐브로 지칭하면서, 큐브의 역사를 설명하던 강연 말미에 큐브 거주자 S씨의 사례가 나왔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지낼 모텔 방을 구하지 못해 결국 70-80년대 벌집을 개조한 숙박업소에 다다른 이야기였어요. 강연자는 “큐브의 역사 유적 체험이 연인 간의 하룻밤보다 더 뜻깊고 알찬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닐까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 농담을 들은 저는 얼굴을 붉히다가 결국 강연 중간에 나오게 되었어요. ‘방의 평등주의’가 실현되었는지 아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말이죠.
그 붉어진 얼굴은 부끄러움도 민망함의 감정이 아니었어요. 너무나 선명한 현실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나온 얼굴이었어요. 마치 ‘아파트 게임’처럼 여기는 강연자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는 관중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웃지 못하는 저는 서둘러 나와야 했죠. 그 이후 이상하게 얼굴의 붉은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저에게 콤플렉스처럼 남아 한동안 거울 보기가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우연히 이사 갈 방을 구하기 위해 탔던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의 붉은기가 드디어 사라진 것을 발견했어요. 사회 속에 자리를 잡는 게 이런 건가 싶었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동공이 네모난 모양으로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C, 당신을 만났을 때만 해도 동공은 동그라미 모양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주변에 하룻밤 방을 찾는, 청약을 신청하는, 집을 구하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네모난 동공으로 바뀌어져 있었더라고요. 네모난 방을 보기에는 이 모양만 한 게 없기도 해요. 다만 언제부터인지를 모르겠어요. 제 SNS 프로필에 ‘건축주 꿈나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던 때부터일까요?
C, “나는 꽤 무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문구를 동그란 눈으로 읽던 저는 어느샌가 위해 꽤 무리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네모난 방을 구하기 위해서 였고, 비록 그곳이 일시적으로 누울 자리일지라도 말이죠. 네모난 방을 위해서 네모난 동공으로 지면에 글을 쓰게 되었고, 겨우 다세대 주택 방 한 칸을 얻어 계약 기한을 되뇌게 되었답니다. ‘뉴제너레이션’이라고 일컬어지는 저이지만, 그렇기에 호기롭게 건축주를 꿈꾸지만, 제 글이 있을 지면에 비해 제 몸을 누일 네모난 공간은 그렇게 단단하지가 않네요. 분명 누군가에게는 바닥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문득 네모난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어요. 사실, 저는 이 바닥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어요. 정작 필요했던 것은 바닥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 보는 누군가의 눈동자였던 것 같아요. 그 네모난 동공 안에서 제 모습이 겹쳐진다면, 붉은기 있는 얼굴이라도 이제는 뚜렷이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애시당초 없는 미래 앞에서 방을, 집을, 건축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작은 면적 정도는 제가 유일하게 바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방은 결국 평등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평등하게 네모난 동공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있잖아요 C, 그래도 네모 속에 머물고 있는 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퍽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집이나 방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동자이거나 예술이라 할지라도요. 그리고 그것에 머물 수 있다면, 저는 이 ‘뉴 홈’을 위해서 미래가 없더라도 흔쾌히 무리해 보려 해요.
근황을 물어보는 게 늦었네요, C, 당신의 동공도 지금 네모난 모양인가요?
이민지
아득히 멀리 떠나오거나 떠나간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나의 집 주위에 있었다. 집을 떠나 집을 찾아 헤매고 집의 안팎을 뒤집는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고 싶은 걸까. 나의 집은 섬이다. 나는 떠나지 않고도 모든 것을. 보기 위해 가만히 앉아 손을 하늘로 향하고 귀 기울일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건 나는 나의 집 주위에 있다.
작가는 나에게 짧은 글을 제안하며 내가 닿고 싶은 도착지에 관해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좀 전에 어떤 이들이 향하는 도착지에 커브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어떤 이들은 아마 ‘철새가 되어 날아가는’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겠지. 나는 나의 집, 섬 아래 바다에서 철새들과 만날 것이다. 가만히 앉아.
*Stay의 답장으로 참여한 Ivetta는 New Home과 Stay를 보다가
공유하고 싶은 한 장면이 생각났다고 이메일을 보내주었다.
Ivetta Sunyoung Kang
지난 6월쯤 캐나다 토론토의 다운타운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었어요. 토론토는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이고 그 과부하로 집을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없는 Homeless들이 가장 많이 밖에 나와 사는 도시입니다. 이 현상은 토론토 어느 공원, 강가, 시내를 가더라고 쉽게 볼 수 있어요. 이 Homeless들은 일부의 편협한 시선과는 다르게 약에 취한 사람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들도 아니에요. 겨울이든 여름이든 텐트를 쳐놓고 살고 대부분 나름의 동네를 이루고 살아요. 큰 공원에 모여 느슨한 원을 이루며 텐트를 치고, 밥도 해 먹고, 불도 피우고 지내요. 공원에 피크닉 온 사람들과 대화와 웃음도 나누기도 하고요. 6월에 일어난 시위는 토론토시에서 미관상 방해가 된다며 텐트족을 쫓아내는 급작스러운 결정에 대한 거부였어요. 그 결정은 고작 그날 아침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고 예상하지 않았던 일임에도 놀라운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어요. 토론토에 사는 아주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직접 나가 마스크를 낀 상태로 서로 팔짱을 끼고 텐트촌을 둘러앉아 지키기 시작한 거예요. 그 공원은 Trinity Bellwoods Park라는 토론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큰 공원이며 항상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에요. 그런 장소에서 얼굴도 성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다 같이 강강술래를 하듯 손을 잡고 몸을 맞대고 Homeless들을 지키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서 있기도 했고 앉아있기도 했고 그런 다양함 속에서도 텐트촌을 동그랗게 둘러 지키는 형태는 풀지 않았어요. 그 원 안에 Homeless들과 그들의 옷, 가전제품, 텐트, 반려동물들을 안전하게 ‘넣어’ 놓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반나절 동안 지켰어요. 날씨는 아직 꽤 추웠고 (캐나다의 6월은) 그렇지만 해는 강렬했고 그런 날씨 속에서 그들은 다 같이 외쳤어요. ‘They are our neighbours!’ 처음 보는 장면이고,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고, 더 나아가 인류에게 바랄 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눈물이 많이 났고 그 시위에 함께하지 못하고 식료품점에 알바를 하러 가야 하는 내 상황이 답답했지만, 반면 안도를 느꼈어요. 시위대와 텐트족들은 마치 다 같이 피크닉을 온 것 같기도 했어요. 피크닉과 시위 그 중간에 위치하며 어떤 ‘장’을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그들은 가족도 아니면서 가족보다도 더 서로를 지켰어요. 경찰이 오기 전까지요. 경찰들이 때리고 시위대를 밀치고 텐트를 거칠게 걷어내는 그 모든 과정은 뉴스에 고스란히 담길 순 없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다쳤어요. 피크닉을 망치는 건 언제나 경찰이 몫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굳게 팔짱들을 붙이고 경찰들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다음 날, 그 곁을 지나가야 하는 일이 있어 공원을 실제로 보았어요. 공원 안은 ‘깨끗’했어요. 토론토시가 바라던 공원의 모습이었어요. 아무도 없었고 산책을 나온 ‘일반 시민들’만 있었습니다. 단 많은 숫자의 경찰들이 여전히 공원 주변을 서성거렸고 그것만으로 전 무서움을 느꼈어요. 5개월이 지난 지금, 다행히 텐트족들이 돌아왔습니다. 아직 시에서는 경찰을 보내지 않았어요. 텐트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을 피우고, 음식을 해 먹으며 반려동물들을 끌어안고 자신의 텐트에 들어가서 잡니다. 그리고 ‘They are our neighbours’ 라고 적혀있는 팻말들을 도시 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었어요. New Home-Stay 영상을 한 시간 동안 시청하고 몇 번씩 더 찾아 들어가 클립들을 보면서, 서로 엉킨 팔짱들 안의 원이 생각났어요. 그 원은 풀어졌지만, 결국 다시 원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어요. 희망이란 단어는 문학과 미디어에서 너무 사용되어 그 빛을 잃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 마음으로 단어 너머의 것을 느끼면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는 것도 배웠어요. 팔짱들 사이의 온도와 햇빛에 비치는 모르는 사람들의 굳건한 얼굴들과 그리고 원 안에서 자신의 터와 시위대를 걱정하는 텐트족들의 마음들까지 다 New Home 같았습니다. Stay 안에 들어간 제 영상을 찍을 때 사실 그 뒤에 캐나다 거위들이 떼로 있었어요. 철새인 그들은 공원에서 곧 어딘가로 떠나갈 준비를 하며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 피크닉 나온 사람들, 그리고 New Home을 상상하던 나, 온갖 새와 지렁이들, 텐트족들이 함께 있었어요. 앞에 보이는 호수를 바다라고 일종의 행복한 착각을 하며. 그런 순간에는 불안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착하지 않음 속에서 정착을 찾게끔 가르쳐주고 얘기해주고 함께 해준 존재들에게 감사해집니다. 캐나다 토론토 이전 indegeneous의 땅에서 잠시 거주 중인 이베타.
*Stay에 참여한 HNV는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멋대로 엮어
Killing Point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주었다.
Killing Point _ HNV
나는, 좋아, 그만두는 것, 이게 우연인가 아닌가 하며 늘 긴가민가했는데, 언제라도 고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구걸하게 되는 것 같아, 바깥에서, 걱정하면서, 예민하게 부추기는 것 같아, 봐달라고, 봐달라고, 또, 봐달라고, 봐달라고, 또, 너덜너덜, 너덜너덜, 참 신기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의, 별, 생각, 없이, 노동을 하고, 언제나, 그깟, 행복한, 감정 소비를 해야 하는, 반복, 한국이지만, 남다른 애착과 집념, 틈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멍하니, 큰 것을, 향하는, 뭐가 어찌 되었든 바닥에 떨어진 후, 결국 해야 하니까, (호호), 내 삶의, 절반은 또, 살아가면서, 헤매고, 그렇게 잠들, 걱정을 한다, 킬포, 는, 나의 집, 이것마저 포기하면 내, 몸도 맘도, 축복인 것 같아, 나는 결국, 떠날 때, 부동산, 주식, 그리고 일자리, 들이, 없기 때문, 희망적인 말, 공감이 잘 가지, 눈물 뚝뚝, 모아 할 수 있는, 세상의 도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