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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fing / Video installation / Dimensions variable, 38min 29sec / 2022

나는 경계를 구분하는 하나의 선으로 들어가 시간을 발생시켰다. 그것은 시청각적 파장으로 기록되었고, 다른 정보 없이 협연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기준선 안/밖에서 파도를 타며 보이는 것을 기록했다. 모두 서핑을 즐기다 돌아왔고, 다른 방향의 선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협연자 A는 예술의 정보와 비평을 생산한다. 그는 자신이 작품 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글씨의 세계에서 유령들을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떠오른 문장들이 작품에 다가가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보다 앞설 수 있는 자유로운 글의 존재를 요청했다. 이제 성인이 된 B는 쏟아지는 세상과 예술을 흡수하며 자신을 발산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감각하는 파도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나는 그에게 자신이 ‘Surfing’을 만든 작가라고 생각하고 작가/작업 노트를 작성해주기를 제안했다. C는 예술의 역사를 배운 사람이고,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것을 다룬다. 나는 그에게 예술의 지난 시간에서 어떤 지점을 포착하여 변경하면, 지금과 다른 현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경로를 찾아 연구를 부탁했다. D는 예술의 영역 안에서 여러 역할을 경험하며 부유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시간과 미술관에서 일하는 시간을 보냈고, 지금은 이곳과 14시간 시차에 머무르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파도를 타는 방법을 안내하며 자신만의 가이드를 작성을 의뢰했다. E는 ‘Surfing’ 영상을 이미지로 가공하고 텍스트를 얹었다. F는 자신의 실패한 작품을 지워 ‘Surfing’의 지지체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G는 파형의 굴곡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소리를 기록했다. H는 켜켜이 쌓인 복잡한 사고 구조를 선호하며, 컴퓨터 코드도 그렇게 짠다. 그래서 몸과 컴퓨터가 항상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불규칙한 방식과 코드들이 꼬여있다. 그것을 연산하는 몸과 컴퓨터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고 순간순간 자동 생성된 이미지들이 개입했다. 여러 번의 서핑이 끝나고 도착한 곳에서 I와 함께 작은 조각들을 배치했다.

작곡, 연주: 차지량-1 / 퍼포먼스, 비디오: 차지량-2 / 제안: 차지량-3 / 사운드 믹싱,마스터링: 정진화
협연:  A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조재연 / B ‘당신에게 고하는 말 나에게 흐르는 마음’ 조은영 / C ‘흔적 기관’ 권태현 / D ‘~’, ‘~~~’ 금지원 / E *** / F ***

         G 연예지 / H ‘_____’ 황선정 / I ‘우연에 기댄 작은 조각들’ 오세라

* 부산현대미술관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로 제작 (2022. 4. 1 - 7. 17)

* 《dream pop》에서 확장되어 전시 (2022. 12. 1- 31)

부산현대미술관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에 참여하며 작성된 노트
 

1. 전시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는 미술(관)의 경직된 풍경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기획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속한 (미술)시스템의 유형을 파악하고 자신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갈증을 푸는 (미술)시스템 내부자로서의 행동이 당대의 미술관에서 가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의 고정적 태도는 드러난 미술계의 정보에 반응하여 만들어지니까.

전시 참여를 결정하게 된 이유 역시 그것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보만을 가린 것이 효과적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극적으로 드러난 것들에 눈이 움직이는 것이 익숙한 이 시대에 다소 건조한 자율성이 부여된 땅에 경계선을 출렁이며 기꺼이 춤을 추는 사람도 있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작품을 만들고, 설치를 하고, 전시가 오픈했지만, 이 참여를 알릴 수는 없었다. 작가는 전시가 오픈하면 무얼 하는 사람이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이, 미술관이, 건물이, 작품을 보관하고, 보호하며, 형식화하며, 소개만을 하는 곳일까? 작품만 제공하는 작가는 이 시스템에서 좋은 역할일까? 

작품과 상관없는 욕망은 더하지 않기를 바라며 지냈다. 전시에서 드러나는 모든 요소는 작품의 정보이며, 작가의 정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작품이라는 방식도 시스템의 형식화를 학습한 영역에 가까운 해석이었다. 나는 뭐지? 호호. 전시에서 드러난 모든 정보는 관객의 눈에 잡히는 표정과 포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나는 그런 표정과 몸짓으로 시작해서 들숨 날숨으로 호흡하다가 춤도 춰보고 돌아선다. 돌아서서 다시 나는 다른 표정이 되기도 하고 다른 몸짓이 되기도 한다. 

이 전시에서 ‘감상자, 비평가의 평가나 반응의 민감함’에 대해 물었다. 민감함을 포함하여 이곳에서 드러난 첫 번째 표정과 몸짓이 적절한 파동을 일으켰다면 그것의 다음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전시 웹사이트에서 발생된 이런 반응이 재밌었다. “작가님의 글에 언급되어 영광입니다. I love kimchi, BTS, Bong Joonho! -마이클 프리드”, “작가가 1명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작가란 무엇일까? -관객 지망생”. 어쩌면 예술의 고정적 개념과 관객이라는 감상자의 구분이 아닌, 예술 현장에서 발생된 단서에 몰입하고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것의 이러한 연습과 유희가 경직된 미술(관)을 유연하게 해줄 가능성이라고 느낀다.

2. 작품

출렁 출렁, 찰랑 찰랑. 현재 많은 것이 이곳으로 빠져들어 가득 찬 상태로 고여 있어서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이곳의 관점을 오히려 널뛰게 해서 자유로움을 범람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 그 파형으로 또 다른 빈틈을 만들어 이곳 밖으로 다른 방향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이번 작업의 동기이자 목표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협연 제안서를 보냈다. 이들은 예술이라는 제도 안/밖에서 활동하는 Player(예술가)이며, 배워온 것을 넘어 자신만의 의지와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술의 지난 시간도 그런 갈증의 증폭으로 나아갔던 반응적 움직임이라 생각하기에 각자의 다른 방향의 파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불러일으켜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Surfing’이라는 영상과 음악을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것은 경계를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춤을 추며 시차의 소리들을 지나치는 것을 기록한 (배경) 영상이자, (배경) 음악이었다. ‘Surfing’은 사람들 개인의 공간 안에서 반복 재생되며 각자의 벽을 진동시켰다. 나는 여기서 파생된 이미지와 오브제, 그리고 글을 전시장이라는 해변에 가져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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