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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어느 비평가의 타임캡슐
김정현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 대상 어드바이징 프로그램 원고

 

본래 이 지면은 경기창작센터의 ‘어드바이징 프로그램’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연에 합의한 평론가는 작가와 만난 후 작업에 관한 글 한 편을 쓰게 되어 있다. 2014년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2015-2016년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로서 국내 미술가 레지던시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작업을 선보인 차지량의 작업 맥락을 떠올려보며 제도비판 미술의 역사를 돌아보거나, 레지던시 제도의 일환이기도 한 매칭 사업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글쓰기로 지난 작업의 맥락을 확장해보는 방법을 고민했지만, 작가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비평가로서의 나의 10년 후에 관해 생각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차지량 작가는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2015)과 같은 작업에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퍼포머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참여자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10년 이상 시간이 흐른 후의 비평가로서의 필자의 삶을 전망해보라는 제안은 단지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는 사고실험 정도로 인식되지 않았다. 이번 경우에는 작가가 편집자-기획자를 자처하게 되면서 매칭 사업의 작가-평론가 구도가 변형되어, 평론가는 ‘어드바이저’ 또는 해설가 역할에서 벗어나 참여 작가 또는 퍼포머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2차 창작의 의무에서 벗어난 비평가의 자가 전망은 이 지면의 성격을 기꺼이 배신하고 ‘개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을 나 같은 인물의 서사를 꾸미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한 단시간에 엄격한 분석의 틀을 짤 능력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미래를 그려보는 건 자의적이거나 추상적이 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할 수 있는 건 현재 ‘비평가’의 상에 관해 내가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보고, 그 진단서를 10년 후에 되돌아보는 것뿐이다. 일종의 타임캡슐을 전하는 일이랄까. 결국 이것은 현재에 이미 실행되고 있는 10년 후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7년 시점, 활동 연차 3년 미만의 신진 비평가의 관점에서 비평의 모습을 재구성해보는 일은 결국 비평 제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먼 길을 한 바퀴 돌아온 생각은 제도 비판 미술에 대한 관조를 그만하고 자신이 속한 영역의 구조를 반성해보도록 한다.

최근에 나는 비평가로서의 역할이나 직업에 관해 입장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비평이 무엇인지 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어느 순간 생각의 몇 가지 모순이 의식됐다. 지난해부터 나는 종종 ‘비평 시장’이라는 말을 했는데, ‘미술 시장을 비평’한다는 건 몰라도 이런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비평이 충분한 경제활동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전까지와 달리 ‘원고료’를 받는 글을 쓰게 되면서 비평을 어쨌든 ‘수입원’으로 인지했다. 청탁 원고와 씨름하며 몇 개월을 보내는 동안 자유롭게 글을 쓸 기회가 적어졌고, 이로 인해 나는 시장이 작가론을 중심으로 비평을 통제하고 있다는 짐작을 비롯해서 비평 시장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물론 이런 적대감은 스스로 일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의 핑계이자, 작가론의 의의에 대한 무감각과도 맞물려 있을 것이다. 작가론이 아니라면 어떤 비평이 더 필요할까. 비평은 시장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취미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까. 별도의 생업이 필요하다면, 이런저런 생업과 결부되어 비평의 방향도 가지각색이 될까. 교수, 강사, 번역가, 편집자, 기획자, 사업가, 시민운동가 형의 비평가는 서로 다른 비평의 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또는 비평이 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을 창출할 수 있을까. 문화를 산업의 관점에서 언급하기 꺼려하는 구세대는 학교라는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평가를 포함한 문화 노동자는 학교 및 기성 제도의 바깥에서 어떻게 자생적으로 창작하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좁게 보면 현대미술이 소수 전공자와 애호가의 소모품처럼 느껴지지만, 약 100년의 흐름을 돌이켜보면 문화적 파급력이 적지 않았다. 감각적 쾌감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의 생산보다도, 그 이면의 아이디어가 인접한 예술 영역의 실험을 촉구하고, 때로 문화산업을 개척하거나, 간혹 예외적 삶의 방식을 지지하기도 해왔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미술로부터 주변으로 ‘흘러넘치는’ 사고의 발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 주시하는 게 비평의 역할이고, 독립을 바라는 비평가라면 그로부터 새로운 사업을 모색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10년 후의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기술로 살아가고 있다면 좋겠다. 그 즈음이면 한국 난민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차지량 작가의 ‘K-Refugees' 퍼포먼스 겸 사업의 성과도 보이지 않을까.

 

김정현 (미술비평가, 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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