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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안녕, 12월
양은혜

*BGM 앨범 수록 원고

 

차지량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12월 갤러리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Never Mine, 안녕’의 낭독회였다. 갤러리의 한 공간에는 관람객이 앞을 보고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몇 줄 마련되어 있었고 나는 중간쯤 앉았던 것 같다. 우리가 보고 있는 벽면에는 전시 포스터 이미지인 하늘색 패턴이 일렁이는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작가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관객 뒤에서 영상과 음악에 맞춰 글을 읽어 내려갔다. 드라마틱한 그의 목소리와 번짐 없이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는 글의 흐름이 독특하여 그 내용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땐 과로와 수면부족, 바깥 추위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던 같기도 하다.

극장에 작품을 올리는 나로서는 정해진 시간동안 앉아 작품을 보고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훈련되어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훈련된 패턴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작품 진행의 중반쯤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 자신의 상상으로 흰 벽과 그 위에 중간 사이즈로 상영되고 있는 영상 위에 상황, 인물 등을 함께 투과시키고 있었다. 나만의 무대가 그곳에서 이뤄지고 있었고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시간들은 그 무대를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낭독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어떤 해방감과 나와 작가의 연령대가 또래라는 면에서 세대적 공감의 끌림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작가와 내가 10대와 20대를 통과하며, 당시 분분하던 타의적 환경과 상황에서 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난 시간들의 동시성은 지난 시간의 우주에서 친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지난 시간을 무던하게 읽어 내려가는 작가와 그가 만들어낸 무대를 보고 있는 관람객으로 나의 담담한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온 자들의 안목에서 감추어져 있던 보상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당시에는 ‘극장’의 구조, 극장성, 그 안에 담기는 작품의 형식 등의 소재로 기획공연을 하고자 했던 터였다. 그리고 갤러리에서 경험한 새로운 극장성, 그리고 인물 없는 무대를 그와 함께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후 작가와 연락이 닿았고 기획명은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로 붙여졌다. 이 기획에서 작가는 2017년 3월 남산예술센터에서 미래의 가상 극장 <Classic, Jazz, Rock>을 거쳐 문래예술공장에서 첫 번째 <BGM>을 발표한다. 그는 <BGM>에서 자신이 경험한 극장에 대해서,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와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극장이라는 공간과 역할은 재생산되고 있었으며 작품이 이뤄지는 실제 극장에 모인 관객에게도 그것은 콘텍스트로 작용했다. 모두가 동시간대에 극장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시그니처로 등장하는 배경음악이 있다. 음악을 먼저 들으면 알 수 없으나 영화를 보고 배경음악을 들으면 음악을 통해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음악은 장면과 감정, 이야기를 공감시키고 불러일으키는 데에 중요한 도구이자 이야기 자체가 된다. 예술은 작품을 통해 어떤 삶을 재구성하고 인간 내면의 파토스를 자극하여 각성하게 함으로써 자신과 주변에 대한 시선의 확장을 제시한다. 차지량의 <BGM>은 관객의 공감을 일깨우고 사유하도록 한다. 바로 관객의 삶을 끌어들여 자신의 작품을 관객의 BGM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관객은 어느새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있으며 BGM은 상상되어 변주되고 완성한다. 그런 점에서 <BGM>은 동시대적이다. 2018년 11월 아카이브봄에서 다시 만난 <BGM>의 확장된 8개의 트랙들은 관객이 된 나에게 여전히 우리는 여기 있었다는 듯이 작품 속으로 나를 흡수시켰다. 1층부터 3층까지의 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악보의 세계이자 극장이었으며 전시장이었다. 그가 음악과 함께 만든 악보와 트랙, 음표들은 넘쳐 있거나 비어있다. 이 공간감은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오가는 운동성을 발휘한다.

극장은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나? 작품인가, 배우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관객이나 작가나 스텝이나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개인의 이야기를 극장이라는 공유공간을 통해서 관객에게 직접 묻는다. ‘안녕’ 그의 극장은 그리고 우리의 만남은 물리적인 극장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기에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2017년 12월 극장에 도착해 먼저 리허설을 하고 있는 차지량의 <BGM>무대로 들어갔을 때, 스크린에 비추던 야경 속 눈 내리는 카네기홀 영상과 소리를 말이다. 많은 스텝이 필요한 극장공연자와 달리 혼자 콘솔박스와 무대를 오가며 사운드와 화면을 체크하던 그는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더니 말했다. “은혜씨, 사운드 체크해보게 아무 말이나 해봐요.” 나는 공연홍보문구를 읽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작가는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호흡과 흐름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조금씩의 칭찬을 받아가며 눈 내리는 카네기홀을 등지고 앉아 심취해 홍보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그와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와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그의 경험을 통해 또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또 어떤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을까. 한 사람의 다른 경험을 통해 나의 어떤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누군가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당신은 누구의 배경인가,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주인공인가? 멀고 따뜻한 12월이다.

 

 

양은혜는 무용과 안무에 이어 글을 쓰고 있으며,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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