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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전경 없는 배경음악, 혹은 피로와 소진 사이:
실없는 BGM의 실마리에 관하여
곽영빈

*BGM 앨범 수록 원고

 

1. 난 <BGM>을 두 번 보고 들었다. 감사하게도 오프닝 음감회에 초대를 받았고, 얼마 후 전시 기간 중 덧붙여진 또 한 번의 공연을 포함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시점은 내 인생 최악의 독감에 너덜너덜해진 상황인데, 돌이켜보면 둘은 그 중심에서 공명한다. 어떤 중심? 피로, 혹은 소진의 중심 사이에서. 

“나는 꽤 무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BGM> 리플릿에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고백은 이 전시와 음감회 전체를 지탱하는 것, 혹은 그것의 (한시적) 부재를 가리키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 “무리”의 과정 속에서 그는 종양을 얻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며, 자신이 평생 작업한 음악을 압축해 뭉게는 음악가와 미술을 관둔 친구를 얻게, 아니 잃게 된다. <BGM>은 이 붕괴의 잔해 속에서 그가 끄집어낸, 일련의 음표와 정동의 스케치이자, ‘시도’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에세(essai)'이다.  
     
2. 전문적인 의미에서 차지량을 ‘음악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를 ’음악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드문 의미에서 ’동시대적‘이라 할 수 있을 어떤 경향과 만드는 또 다른 공명 때문이다. 그의 음감회를 보고 들으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Nils Frahm과 Max Richter를 위시로 부상한 소위 '포스트 미니멀리즘' 계열의 음악이었다. 

주지하듯, 그것의 중핵은 아마 한 줌도 안 될 조합의 음표와 리듬이 만드는 단순하고 '기계적(machinic)'인 반복에 있다.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기에 어느 순간 '영적(spiritual)'으로까지 들리는 지속을, 이들은 피로와 소진의 수납장인 '인간'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마모와 파열의 지점들을 넌지시, 혹은 금욕적(stoic)으로 전시한다. 이 점에서 이 경향은- ‘수동적(passive)’이랄 수는 없겠지만- ‘능동적(active)’이라기보다는 '반응적(reactive)'인 쪽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작업은 Arvo Pärt나 Philip Glass, Michael Nyman의 작업과 구분된다) 

 

3. 이들의 '라이브'가 예를 들어 Kraftwerk나 Daft Punk와 같은 이들의 공연과 다른 것 역시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루핑으로 전자 트랙을 돌려놓고, 비슷한 방식으로 돌려도 무방할 정도로 거의 비슷해 뵈는 리듬과 패턴의 음뭉치(chunk)를 반복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수 십 마디 연주하는 Nils Frahm의 '라이브 공연'은, 전자적 알고리듬이 아니라 몸으로, 즉 결국은 지칠 수밖에 없기에- '기계가 될 수 없다'는 엄격한 의미에서- 기계'적'으로만 반복하는 퍼포머인 Frahm의 육체를 시청각적으로 '전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연주는 '트랜스(trance)' 상태에 이르지 않으며, 그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물론 잠시 트랜스 상태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이 지치고, 피곤해한다는 사실이고, 그리하여- 탈진하지 않는다면- '잠'에 드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8시간에 이르는 연주 시간은 물론, 청자들이 실지로 잠에 들 수 있게 했던 Max Richter의 <Sleep>은 정확하게 이러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논리의 산물로, 예를 들어 840번을 반복해야만 끝나는 Erik Satie의 <Vexations>(1893)과는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구분된다 (Satie가 반농담처럼 제기한 듯 보이는 이 도전을 Nicolas Horvath란 연주자는 말 그대로 이행해왔는데, 그는 2011년에는 9시간 41분, 2016년에는 24시간 동안 단 한 번의 휴식 없이 이 곡을 완주해 유튜브에 업로드해 놓았다. 놀랍게도 후자는 가장 긴 버전이 아닌데, 그 자신이 덧붙인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2012년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무려 35시간짜리 길이의 완주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4. 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던 Max Richter의 <November>는 사실 그 열광적인 반응과 독립적인 맥락에서 매우 극단적인 사례들 중 하나다. 특히 곡의 후반, 약 4분을 넘어가는 지점부터는 (나를 포함한) 민감한 청자들의 귀에 분명히 거슬릴 정도로 흔들리고 불안한 바이올린의 피치를 그대로 '마스터링'해 내놓는데, 이는 누적된 피로로 '마모'되어가는 연주자의 육체와 함께, 어느새 '파열'의 임계점에 다다른 스트링을 오롯이 증거하고, 이를 통해 Alvin Lucier와 같은 이들이 남긴 사운드 아트의 유산을 먼 배음(overtones)의 하나로 소환해낸다. 

 

5. 소위 '인디 클래식(Indie Classical)' 음악이라는 기이한 레이블로 이들의 작업을 평가절하하려는 (사회학적) 시도들, 다시 말해 '이게 무슨 클래식인가!'라는 클래식 하드코어 팬들의 (노스탤지어적) 격앙과 냉소 앞에서, 이들의 작업은 스스로를 일종의 '깨진 거울'로 들이 민다. 

어떤 의미에서 고전주의부터 20세기의 '현대음악' 이전까지의 레퍼토리만을 강박적으로 리사이클링하면서, 새로운 상업적/인구적(popular) 활로를 찾지 못한 채 디지털 시대에 들어선 클래식 음악(장르)의 이중적 불안 angst, 혹은 그것이 가사상태는, 청자를 탈진 직전까지 몰아붙이거나 '잠'에 빠뜨릴 때까지 반복되는 음의 '기계적' 패턴 속에서 역설적으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클래식의 '연옥'을 떠도는 '영원'의 환상, 혹은 결코 닿지 않는 평행선의 악몽을 '기계적으로' 풀어헤치며 우리를 엔트로피의 내리막에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포스트 미니멀리즘'이 만들어내는 공명과 소음의 원천이자, 심정지 상태에서 단속적(斷續的)으로 연장되는 클래식의 사후경직(死後硬直 rigor mortis) 현상인 것이다.

 

6. 물론 차지량의 BGM은 이처럼 피로와 트랜스, 혹은 각성과 사후경직 사이에서 진동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베케트가 말년에 집중했던 일련의 비언어적 작업들에 대해 들뢰즈가  논파했던 의미에서 ‘피로’와 ‘소진’ 사이에 선다. (즉 그는 베케트가 아니다)

<BGM>은 멀게는 2006년 7월 4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들어진 ‘Inside'에서 시작해 2018년 7월 4일 독일 베를린에서 만들어진 Gm을 가로지르는, 12년간의 이동, 혹은 진동의 산물이다. 후자는 그가 공연중 낭독했던 진중한 의미에서 몇 년간 지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문구였던 ‘굿모닝’, 혹은 ‘G마이너’(코드)로 읽힐 수 있는 첫 곡으로, ‘굿나잇‘ 또는 한글 자판이라면 ‘후(after)’로 읽힐 수 있을 여덟 번째 곡인 Gn에 이르러 끝난다. 대부분의 곡들은 대단히 단순한 코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고, 그렇지 않을 때조차-‘나의 극장‘의 세 번째 파트를 이루는 ’Fake Jazz’처럼- 건반악기 안에 끼워져 있던 샘플링 곡 같은 느낌을 주며, 두 번째 곡 제목인 'Classic, Jazz, Rock‘처럼 기성곡의 관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7. 이는 이 전시에 대한 비판이 아니며, 동시에 작가가 이러한 자의식적 비판을 의도했다고 얘기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음악들이 그가 음감회에서 보여준 일련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려 유지하던 어떤 긴장과 간극이다. 2층의 악보와, 미리 신청한 제한된 관객/청자들에게만 노출된 3층의 음감회는, 이 전시를 전통적인 의미의 전시와 음악회 양자로부터 기이하게 떼어놓으며, 그 말의 드문 의미에서 배경음악(Background Music)으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이러한 경향의 정점, 혹은 저점에 놓인 것이 2013년 1월, 그가 무작정 표를 사고 도착한 미국 카네기홀에서,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묘사한 연주를 뒤로 한 채, 공연이 끝날 때까지 홀의 복도에서 그 잔향을 들었다고 회고하는 지점이다. 그가, 혹은 우리가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목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클래식? 멀게만 들리던 잔향? 혹은 그가 구글에서 추출해 재구성한 카네기홀의 복도 이미지? 혹은, 그가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아래에서 느꼈다는 형언할 수 없는 진동은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카네기홀에서 울려 퍼진 음악이나 복도로도, 혹은 피아노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이나 피아노 그 자체로도 환원되지 않고, 그들의 '배경음악(BGM)'으로, 오롯이 선다. 전경 없이. 

 

8. 피로(la fatigue)를 소진(l'épuisement,)과 구분하면서, 들뢰즈는 구두를 신고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 안에 머물며, 실내화를 신고서는- 안에 머물지 않고- 외출하는 경우를 후자의 사례로 든다. 피로가 어떤 목적과 계획의 실현에 복무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잔해라면, 소진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근본, 즉 바닥 없는 것(rien)과의 대면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풀어쓰면서. 

 

BGM을 두 번 경험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평안과 불안은, 그 시공간이 만들어내는 듯했던 일종의 안식 역시, 근본적인 차원에서 또 다른 클리셰로서의 음악과 이미지, 혹은 그 둘의 결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는 예감과 다르지 않았다. 이는 두 번째 공연 이후 이어진 관객들의 request속에서 내가 보고 들은 네 곡 모두가, 내가 그 전 한 달 동안 유튜브에서 보고 들었던 곡이었다는 우연을 통해 증명된 것인지도 모른다. ‘증명’? 무엇을 증명했다는 말인가? 우리의 ‘독특한’ 취향, 혹은 ‘취향의 공유’를 통해 이뤄지는 이른바 ‘느낌의 공동체’의 감각이란, 어쩌면 겨우 ‘알고리즘’ 따위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 혹은 이에 대한 망각. 

들뢰즈가 소진을 “건망증이 심한 증인“과 연결 짓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차지량의 <BGM>이 전경화 하는 것처럼 (어렴풋이) 보이는 것, 혹은 (어렴풋이) 들리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배경의 기억(Background Memory)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베케트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가장 피곤하고 힘들 때, 혹은 거기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회복되고 있다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우리를 허무하게 되돌려 보내는 기억의 부재, 즉 습관적인 건망증의 산물인 ‘아름다운 이미지와 음악‘들이 상연되는 공연장, 그 카네기홀로부터 우리를 복도로 이끈다. 우리는 그 텅 빈 복도를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잔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복도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가 그랜드 피아노 아래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두를 신고 안에 머물고, 실내화를 신고 외출하는 소진된 이들까지는 아니라 해도, 구두와 실내화를 한 짝씩 신고 건물을 들락날락하는 어떤 실없는 사내처럼 말이다. 

어쩌면 바로 거기에 진정한 실마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곽영빈 (미술평론가, 전직뮤지션)

Art Critic (Winner of the 1st SeMA-Hana Art Criticism Award, 2015)

PhD (Cinematic Arts, U. of Io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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