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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부쳐진 일기, 맴도는 편지
Public Art 이민주


A Journal Sent, A Letter Spiralling
Public Art Lee Minju

*Public Art 2020년 2월호 기고문

말은 종종 대상에 자격을 부여하고 의미를 규정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술에서 ‘작가의 말’은 작품 감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작품을 감상하거나 미술에 대한 글을 쓸 때, 보는 사람, 혹은 쓰는 사람은 작가의 말을 빌려야 할까? 아니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면서 작품 자체에 내재한 의미를 찾아야 할까?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60년대에 (신화적)저자를 죽인 이후 작품의 의미는 더 이상 작가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작품은 하나의 텍스트(text)로서, 그것을 둘러싼 맥락(context)과의 관계에 의해 해석된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면,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차지량의 작업은 차지량의 ‘말’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제19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발표하는 작업이 스스로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면서 마주한 모든 이에게 부치는 편지라고 말했다. 출품된 작업은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와 <개인의 장벽, 개인의 날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난 2012년 12월 20일부터 전시의 시작일 바로 전날인 2019년 12월 20일까지 쓴 편지를 두 작업으로 엮은 것이다. 하지만 영상과 사운드, 텍스트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말들은 실상 편지라기보다 일기의 형식에 가까워 보인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자기 고백과 낯선 풍경의 이미지는 개인의 일상을 기록한 것과 다름없으며, 작가 또한 지나온 긴 시간에 대한 이 기록들이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는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에서 재생되는 짧은 영상 푸티지가 담은 사사롭고 거친 장면에서 인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견 흔한 여행 일기와 다름없는 기록이 편지의 형식으로 말 해질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누군가에게 부쳐지는 까닭이다.

일기는 개인의 사적인 일상을 내밀하게 담는다. 차지량의 이번 작업이 작가 개인의 삶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고백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말은 작품을 중계하는 기능적 형식이 된다. 어쩌면 시대착오적이거나 지루할 수 있는 개인 삶의 기록 혹은 고백이 흥미로운 건, 그것이 오롯이 작가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전시장 벽에 붙은 텍스트에서 이처럼 말했다. “답 없는 체념의 세계에서 혼자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 세계에 익숙해 지면 여러 의미에서 언젠가 벽을 잊는다. 어디까지가 나인지도 모른 채로." 이 문장으로 말미암아, 차지량의 작업은 "그동안 쌓아온 개인의 장벽 바깥"을 넘으려는 시도이며 장벽이 고립 시킨 어떤 것들에 관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그가 던지는 질문은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우리'로 답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 이름들을 어떻게 단독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지 고민한다. 말하자면 '우리'로 퉁쳐진 단어가 얼마나 한 사람을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것이다.

차지량은 <일시적 기업>(2011), <New Home>(2012)과 '한국 난민' 시리즈(2014-)등 그간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학습하는 사회 구조 및 개인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전자는 기업 시스템과 도시의 주거 시스템에서 소외된 개인, 후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 내에서 거하거나, 탈주하는 개인에 관한 작업이다. 이 모두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편 송은 아트스페이스에 올라온 그의 작업은 관람객이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간의 작업과 차이를 보이지만, 내적인 차원에서 그 중심축은 같다. 지난 행적이 특정한 사회 질서에 속한 개인의 서사를 다룬다면, 이번엔 시스템의 분명한 테두리를 건드리기보다 한 명의 개인과 그를 둘러싼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곳의 한 사람이 저곳의 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차지량은 스스로 불규칙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에서 작가는 자신이 거쳐 온 여러 나라의 시간을 겹쳐놓는다. 불규칙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건 다양한 시간이 섞여 있음을 말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차지량의 영상이 관람되는 경험에서 반추해 볼 수 있다. 관람객은 영상을 보는 동안 좌석벨트를 매라는 지시사항을 숙지한 채 하늘색 커튼 안쪽으로 들어선다. 은은한 파란빛 아래 텔레비전 모니터, 그 앞에 의자가 일렬로 놓여 있다. 좌석벨트를 맸건 아니건 정각마다 영상은 시작된다. 모니터 뒤로 유영하는 구름의 이미지, 의자 옆에 창문처럼 부착된 얇은 모니터 이 모든 조건은 비행기의 구조를 닮았다. 비행의 경험과 동치 되는 이 관람 조건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다니는 상태와 '이동'의 시간을 상기시킨다. 차지량은 관람객에게 이곳과 저곳의 시차를 가로지르며 유동하는 움직임 자체를 감각하는 동시에 그 시간에 머무는 개인의 위치를 찾도록 요구한다.

한 사람은 타자의 요구에 응답하며 출현한다. 이 타자는 시스템, 제도, 법,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가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요구하면서. 하지만 서로를 아주 쉽게 이해한다는 건 자신의 시선을 대상에게 투사한 결과로서, 어쩌면 개인이 가진 각기 다른 고유성을 지우는 일이 된다.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라는 말 대신 한 명의 주체로서 나의 자리를 위치시키고, 이 편리한 투사를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차지량은 그 경계의 길목에서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중의 시간에 머물며 가닿을지 모를 불안의 편지를 부친다. 언제, 어디로, 누구에게 도착할지 모르는 편지는 허공을 맴돌면서 당신의 불안으로 응답받길 기대한다.

이민주 Contributor (이미지 연구 공동체 '반짝'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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