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잠과 노래 사이,
혹은 모든 것을 보고 떠난 이들에게 귀 기울인다는 것
곽영빈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Album 수록
1.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표제작인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는 양자를 ‘편지’로 규정한다.
“나는 한 개인이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 할 때 갖게 되는 시점, 다층적 기억에서 나의 좌표를 확인하며 날아가는 꿈을 꾼다. 나는 이 여정을 편지로 담았다.”
실지로 그의 많은 오디오비주얼 작업들은 종종 서간문의 양태를 참조, 또는 변주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동하면서 음악을 만들거나 편지”를 쓰는 이유로 작가가 “이동하면서 잠을 못자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지점이다.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는 40분이 넘는 오디오비주얼 작업으로, 작가가 지난 10여년 간 머무르고 떠난 일련의 나라와 장소, 또는 비행기에서 포착한 하늘과 땅의 이미지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에 작가는 2018년의 <BGM>전시에서 중핵을 차지했던 Gm과 Gn, 즉 ‘굿모닝’과 ‘굿나잇’이라는 인사를 끼워넣는데, 보다 보면 아침인사와 저녁인사라는 의미가 옅어지다 못해 내파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낮과 밤은 물론 장소와 시간의 변화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실지로 그는 자신이 “어디에 머물더라도 불규칙한 시간을 사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데, 이렇게 “이동하면서 잠을 못자기 때문”에 “이동하면서 음악을 만들거나 편지”를 쓴다는 의미에서 그의 작업들은 그의 ‘불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 편으로 그의 이전 전시들이 이동과 떠남, 혹은 낮과 밤의 구분을 가로지르는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거주양태를 탐구해왔다는 사실은 물론(〈이동을 위한 회화〉(2008), 〈Midnight Parade〉(2010), 〈일시적 기업〉(2011), 〈New Home〉(2012)과 〈한국 난민〉 시리즈(2014-), 〈BATS〉 프로젝트(2016-), 〈BGM〉(2018)) <Strike, Sync>가 환기하듯, 그가 매년 오르는 집값의 파도에 떠밀려 이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던 2012년, “공사중 비어있는 ‘새집’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잠들곤” 했다는 사실과도 직결된다.
2.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잠, 아니 그것의 부재와 지속적인 잠식과정이 그의 작업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함의는,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경험하는 사운드스케이프의 특성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대개 그의 작업들은 청각적으로 잔잔한데, 어떤 이들에게 이는 ‘졸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고, 설사 소리가 들린다 해도 그 데시벨은 거의 높지 않은데, 그가 메일이나 SNS에서 종종 사용하는 ‘호호’라는 의성어 역시, ‘폭소’와 ‘미소’ 사이의 음역대에 걸쳐 있다. 이는 “어릴적 온라인에서 조용하게 소리를 질렀던 것처럼” 그가 “말을 하지 않았던 시간 동안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과도 연동한다. ‘가사에 음을 얹은 것이 노래’라는 통상적인 이해를 염두에 둘 때, 그의 작업에서 ‘노래’가 들리지 않고, 대신 조용한 문장들을 오래도록 읽게 되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그의 작업이 유도하면서, 동시에 가능성의 조건이라 할 ‘잠’이, 어떤 근원적인 의미에서 작가가 원하는 것임과 동시에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역설에 있다. 그 누가 자신의 작업을 보거나 들으면서 자길 원한단 말인가? ‘이번 작업 너무 좋았다’고, ‘너무 좋아서 보다 잠이 들었다‘고 비꼬지 않으며 말하는 관객과 청중을 본 적이 있던가?
3. ‘그렇다‘, 아니 ’그랬다면 다행‘이라고 화답한 이들 중 하나가 지난 몇 년간 전세계적인 반향을 얻은 작곡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였다고, 나는 2018년 그의 <BGM> 전시 도록에 쓴 글에서 환기한 바 있다.
리히터는 청중이 잠들길 원하며 ‘거대한 자장가’로서의 음악이라 할 <잠 Sleep>을 만들었고, 8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은 실지로 청중들이 듣다가 언제든 잠들 수 있는 침대형 쿠션으로 채워졌는데, 닐스 프람(Nils Frahm)등과 함께 ‘포스트 미니멀리즘’이란 이름표를 부여받곤 하는 이 계열의 음악들은 말 그대로 미니멀한, 최소한의 음표와 리듬을 단순하고 '기계적(machinic)'으로 반복하면서도 이를 ‘라이브’로 연주함으로써, “피로와 소진의 수납장인 '인간'으로 하여금...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마모와 파열의 지점들을 넌지시, 혹은 금욕적(stoic)으로 전시한다.”
작가가 2018년의 <BGM> 전시를 “나는 꽤 무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열었고 그러한 “무리”의 과정 속에서 종양을 얻어 수술까지 했으며, 자신이 평생 작업한 음악을 압축해 뭉게는 음악가와 미술을 관둔 친구를 잃었다는 정황은, “정권이 바뀌었지만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반복적으로 관류하는 코드들의 단순함을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4. 이렇게 잠식된 잠과 그것의 부재를 통해 만들어진 차지량의 작업들이 다시 잠과 맺는 선택적 친화력의 역설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탁월한 오디오비주얼 아티스트였던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1969년작 <꺼지지 않는 불 Inextinguishable Fire>의 문제설정을 당대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주지하듯 이 작업에서 파로키는 ‘냉전(Cold War)’의 이름 하에 미국과 유럽은 물론, 동방의 한국까지 삼켜버린 ‘열전(Hot War)’이었던 베트남전을 배경 삼아, ’재현불가능성(the Unrepresentable)‘의 문제를 탁월하게 포착한 바 있는데, 제목인 ‘꺼지지 않는 불’은 미군들이 정글을 쓸어버리기 위해 투하했다는 ‘네이팜탄’을 지칭하는 것이다. 3천도의 온도로 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인간의 신체에 닿으면 뼈가 보일 때까지 피부를 녹여버린다는 이 끔찍한 폭탄이 자신 근처에 떨어진 뒤, 정신을 잃고 입원한 베트남 여인의 편지를 읽은 파로키는, 카메라를 직시하며 관객인 우리에게 일종의 아포리아(aporia)를 제시하는데, 이를 풀어쓰면 대략 다음과 같다.
‘네이팜탄이 얼마나 끔찍한 무기인지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면 그것이 이 여인의 몸에 남긴 상처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그토록 끔찍하다면 당신들은 눈을 감을 것이고, 당신들이 눈을 감는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환기는 의도한 효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보여주면 눈을 감을 것이고, 그렇다고 보여주지 않고 말로만 전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참상을 ‘영화’란 매체로 전달하려면? 이렇게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요구, 또는 그 한계의 윤리를 놓고 진동하던 아포리아를, 차지량의 최근 작업들은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무는 거주의 불안정성과 이에 수반되는 ‘잠’의 변화된 위상을 시각성 자체보다 그것과 연동하는 청각성의 차원에서 감각적으로 세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5. 문제는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는 문장에는 어떤 ‘의지’가 담겨 있지만, 우리의 세상은, 그곳이 한국이건 말레이시아건, 독일이건 미국이건, 그것을 ‘신자유주의’라 부르건 ‘인지자본주의’라 부르건 간에, 우리 모두를 언제건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로 매일매일 바꾸고 있고, 우리 역시 이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혹은 사라지는 중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은 과연 메꿔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한 편에서 강요된 떠남을 통해 모든 것을 보게 된 이들과, 다른 한 편에서 떠나려는 의지를 통해 “모든 것을 본” 이들 사이의 계곡. 즉 ‘의지’와 ‘의무’ 사이의 진동, 혹은 낙차.
니체는 그러한 의지를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의미에서 ‘Amor fati’라 부른바 있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아모르 파티’란 가수 김연자가 자신에게 익숙치 않은 EDM 장르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알지 못할 이유로 역주행, ‘사랑의 파티(Amor Party)’로 오해 되며 잠시나마 유행했던, 어떤 의미에선 ‘희화화’됐던 ‘힙한 트로트’일 것이다.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에서, 가능하다면 한 시간이라도 잠을 줄여야 한다는 권고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우리의 노동은 진정 춤과 혼동될 수 있을까? 이 강권은 진정 우리의 ‘운명’이며, ‘파티’일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주될 수도 있다. “떠나려는 사람”이 본 “모든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경계들이 무화되어가는 세상의 모습이다.
<목소리가 몸에게>에서 그가- 다미쉬가 “표면 없는 몸(corps sans surface)”이라 정식화한 바¹ 있는- ‘구름’을 떠올리면서 “몸이 없는 존재”가 되는 “어린 시절의 꿈”을 환기하고, 지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찍은 일상의 지극히 평화로운 영상들을 삼면화(Triptych)의 전통 속에 ‘스트리밍’한 <내세 After Life>에서는 “아무 것도 닿지 않는, 아무 일도 없을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세계”를 자신의 목소리로, 한 아이의 목소리와 중첩시키는 건 이러한 ‘경계들의 무화’라는 차원에서 내재적으로 연동한다. 특히 이 세상의 이미지들로 이뤄진 “내세”가 “아무 것도 닿지 않는, 아무 일도 없을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세계”로 물구나무 세워지는 지점은, <Surfing>과 <검정파도>처럼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 규정한바 있는 열화된 데이터 스트리밍의 낮은 해상도 작업과 흥미로운 짝패를 이룬다. 천국과 데이터 노이즈,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데이터로) 흐르기만 하는 세상에서 굿모닝과 굿나잇이란 인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슬픈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오던 날” 그가- 이번에도 가사 없이- 연주한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역설적으로 적절하게 들린다. 진압군이 기총소사로 시위 군중을 사살했다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최고책임자였던 전두환이 ‘자연사’할 가능성이 농후해진 21세기 한국에서, ‘1980년 광주’란 어쩌면 일상 속으로 불분명하게 흩어져 버린 건 아닐까?
6. 2015년 발표된 보고서에서 한국인의 평균 수명시간은 7시간 49분으로, OECD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30여분 적었고, 조사 대상국인 18개 국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밤과 낮,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이 갈수록 구분 불가능해지는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는 건 대체 무엇을 뜻할까? 모든 것을 보려면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것일까? ‘장소특정성’이란 개념이 더이상 미학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무의미해진 세상에 ‘버추얼 갤러리’로 구현된 차지량의 이번 전시는, 오히려 ‘모든 것을 보고 떠난 이들’에게서 흘러나올 법한, 나지막한 소리와 속삭임들을 (가끔씩) 들려준다.
그래서 잠에 들었다거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을 줄이며 모든 것을 보고 떠난 이들에게 귀 기울인다는 건, 잠과 노래 사이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기도 하며, 그 사이에서 고장난 형광등처럼 깜빡이고 현현하는 세상을 기적처럼 목도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곽영빈 (미술평론가, 전직뮤지션)
1) Hubert Damisch, Théorie du Nuage: Pour une Histoire de la Peinture, Paris: Seuil, 1972, p.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