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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안의 바깥
​권태현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Album 수록

 

작가님, 이라고 섣불리 썼다가 지웁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니 당신을 먼저 부르고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간단한 의도이지만, 고민이 바로 뒤따릅니다. 순간적으로 당신이 그렇게 부르길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 바깥에서. 당신이 나를 친구라고 호명한 것이 내겐 참 크게 다가오더군요. 그렇지만 당신이 더 좋아할 표현을 찾아 쓰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유난히 한글로 썼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번역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어떤 언어에서는 이름 뒤에 위계나 위상, 위치를 암시하는 꼬리표를 달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죠. 다른 언어의 체계와 그것을 통해 형성된 문화는 번역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하지만 그 번역의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도 있습니다. 다른 것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랄까요. 당신이 말한 그 ‘떠나려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더 생각해보면 사실 여기에서 당신을 부르는 행위 자체가 기만이기도 합니다. 이 답장은 당신에게만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공개되는 것임을 알고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관계를 상연하는 이상한 형식이지만, 나는 이런 방식의 편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곤 합니다.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관계의 안쪽도 바깥쪽도 아닌. 그 사이에 일부러 머무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라슬로 네메즈 감독에게 썼던 편지가 생각나는군요. 그 학자는 감독의 영화 <사울의 아들>이 하나의 괴물이라는 역설적인 상찬으로 시작해 영화에 대한 비평을 이어갑니다. 물론 나는 당신의 작업을 상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비평가라는 버거운 이름을 달고 쓰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나를 친구로 불렀기 때문에 쓸 수 있게 된 글, 혹은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해볼까요. 비교적 유명한 작가인 당신을 나는 먼저 알고 있었어요. 유명 작가라는 말은 작가라는 말보다 더 싫어하겠지만, 나는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그 텔레비전 쇼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군 복무 중이었죠. 아주 작은 것에도 크게 감응할 때였기 때문에, 현대미술 작가들의 경연 쇼가 나는 참 신기했습니다. 재미가 아니라 신기요. 쇼의 내용보다는, 뭐랄까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는 기획을 가지고 모두 최선을 다해 진행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당시의 짧은 식견으로도 현대미술은 그렇게 다뤄질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쇼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실천을 펼친 사람이 한 명 있었고, 그게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머리에 고프로 카메라를 차고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여 작업의 대상으로 삼거나, 경연 자체를 가지고 놀면서 관객들, 아니 시청자들에게 소격을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장 깊숙한 안쪽에서 바깥을 솟아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는 당신이 참여한 전시나 공연에서 수차례 당신을 만났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었지만, 당신이 나를 보고 있었을지 모르겠군요. 관객이라는 다중을 생각합니다. 하나의 집단도 아니고, 온전한 개별자도 아닌, 공동의 경험을 나누는 순간적인 공동체. 그러고 보니 당신이 다중 속의 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 언제인지 궁금하군요. 작년에는 가까운 친구가 당신에 대한 글을 적기도 했고, 몇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함께 전시를 꾸리게 되었죠. 기쁜 일이었어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당신의 고민과 실천을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그중 일부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죠. 무엇보다 그 고민은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개인과 시스템, 그리고 안과 바깥에 대한 것들. 그렇게 나는 운이 좋게도 당신의 작업을 여러 차례 다른 방식으로 살펴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귓가를 맴도는 선율과 일렁이는 이미지들이 지난 몇 달 내 삶에 스며들었습니다. 당신이 만든 음악을 일상적으로 듣곤 했죠.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만든 소리들을 사랑했던 것인지, 단지 큐레이터로서의 책무였는지는.

 

돌이켜보니 당신의 작업에는 일상과 예술의 관계와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부분이 또 있군요.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읽었던, 플라자호텔의 모니터에서 봤던, 당신의 글들은 기시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것들이 일상 속에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이미 보았던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그 글들을 한 번, 두 번, 세 번, 다른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장소에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다 말고, 나는 당신의 타임라임에 접속해 다시 거슬러 오릅니다. 당신은, 이전 작업을 계속 꺼내보는 사람, 거듭 안부를 묻는 사람, 음악을 만들고, 풍경을 담고, 편지를 쓰는 사람이군요. 당신의 타임라인에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나, 몸짓들도 뒤섞여 있습니다. 갑자기 화면에 나타난 신현아 안무가의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다 들어간 당신의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에는 상상마당 채용 면접의 음성이 들어있더군요. 전혀 다른 말들이 충돌하고, 이상한 세계의 만남이 벌어지는 기묘한 분위기의 연극 같았습니다. 고프로를 차고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당신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이거 전시를 하나 보고 온 느낌이네요.

 

전시된 소셜미디어 포스팅들은 무엇이 되는 걸까요. 나는 그것을 레디메이드의 전통에 놓아 봅니다. 세계를 다 담아낼 기세로 육중해진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을 움직이는 동력은 광고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올리는 말들과 이미지들은 모두 그 광고를 촉진하는 것에 사용되기도 하지요. 텔레비전 쇼가 구조적으로 광고를 위한 콘텐츠이듯, 우리의 말들이 상품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메타 미디어이자 메타 상품이죠. 상품의 체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가 또 다른 차원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에, 판단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다는 식의 표현은 무책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작업으로 매개했을 때, 특정한 연결과 끊어짐을 발생하는 것을 감각할 수 있습니다. 레디메이드라는 현대미술의 오래된 방법론이 개척한 길이죠. 여기에서 나아가 텔레비전 쇼나 소셜미디어 포스팅을 작업의 도구로 삼는 당신의 형식에서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말로 작동해야만 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려는 책임감 말입니다. 자본주의 바깥의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오늘날. 돌파구는 그 안쪽을 파고드는 길에 있을까요? 안쪽에서 바깥쪽의 원리가 작동하는 작은 구멍을 내는.

 

어쩌다가 삶과 예술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삶과 예술의 문제는 아주 작고 미미한 것이기도 합니다. 플라자 호텔에서의 경험이 떠오르는군요. 빛나는 눈들, 몽롱한 말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이상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 시답잖은 농담들, 그 사이로 뜬금없이 시작되는 왜 흑인 문제에 동양인이 연대해야 하는가 같은 토론. 바깥의 것들이 함께 당기는 힘. 그렇게 만들어지는 부정의 공동체. 구심력과 원심력에 대한 이야기들. 가장 크고 동시에 너무도 작은, 하나도 쓸모가 없으면서도 무엇보다 필요한, 순간적으로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면서 누군가의 삶을 영원히 바꾸는. 그 말들의 내용과 함께 그곳이 플라자 호텔이라는 것도 작동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예술 작업으로 매개된 시간과 공간이었죠. 삶을 예술로, 예술로 삶을 사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어렵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순간, 물에 비친 세계와 실재의 세계가 뒤집어진 당신의 몽롱한 이미지가 비쳐 오릅니다.

 

당신이 모아 놓은 글에 거듭 적힌 날짜를 봅니다. 작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은 날들이 적혀있네요. 아주 최근의 날짜도 보입니다. “공동의 일기장”이라는 글자도 눈에 들어오는군요.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적으로 쓰였던 글들이 여기에서 다시 읽히고, 쓰였던 것과 쓰이고 있는 것이 뒤섞입니다. 제작 기간이 있는 예술 작업으로 본다면 그것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가 되겠네요. 삶의 운행과 예술의 실천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요. 삶의 바깥에 예술이, 예술의 바깥에 삶이 있기보다는, 삶의 안쪽에 예술이, 예술의 안쪽에 삶이 있는 형상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떠난다는 말을 또 무엇일까요.

 

당신이 이번 작업으로 너무 많은 것을 정리해버리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하지만, 당신은 애초에 안쪽의 바깥이었기에 어딘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머무려는 사람과 떠나려는 사람은 과연 다른 존재일까요? 혹은, 떠나는 사람과 떠나려는 사람은 또 어떻게 다를까요? 게다가 모든 것을 본다니. 나에게 모든 것을 보는 존재 역시 너무도 두려운 대상입니다. 떠나려는 사람의 감각을 말하는 그 제목의 역설을 통해, 나는 머무려는 사람이 보는 것을 다시 돌아봅니다. 떠나려고 하면서, 당신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나요? 그 모든 것에는 무엇이 비쳐 보이나요?

 

이 글을 완성하면 나는 당신에게 메시지를 먼저 보내겠지요. 그리고 처음에 당신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여지없이 물어볼 것입니다. 글이 어떤가요?

 

 

2020년 12월 23일

당신의 친구 권태현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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