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친애하는 나의 친구 차지량에게,
공준석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Album 수록
차와 알게 된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내 기억엔 아마도 한 8년, 그가 <New Home>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을 즈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내가 한 번쯤 생각해봤음직한 사회적 문제들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고, 그 작품들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그와 공유할 수 있음에 즐거워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가 부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는 부족한, 어떤 문제를 딱딱하지 않고 유연하게 풀어내며, 또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공감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이야기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자 욕구이다. 시간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이 겪어온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타인으로부터 이야기 듣기를 원한다. ‘이야기적 정체성 narrative Identity’을 주장한 폴 리쾨르는, 누군가의 정체성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이야기가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친근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나눔’을 전제로 한다. 홀로 내면의 자신과 마주할 때에도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 즉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스스로를 발견하고 갈등을 해소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하는 것과 듣는 것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총체적 경험이다. 실제로 우리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찾아오는 소외감 내지는 고립감은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나눔을 통해 해소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기술 매체의 발달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타인과 연결해주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스냅샷과 해시태그로 대변되는 짧은 단어들로 자신을 보여주는 데 더 익숙하다. 이는 우리의 삶과 경험을 단순한 정보의 차원으로 변형시키며, 이 압축된 정보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물론 기술은 접속을 통한 접촉과 같이 이야기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상대와 마주하며 이야기할 때와의 차이, 그리고 한계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는 이야기가 결핍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우울과 무력감과 같은 정서의 유행에 이야기의 결핍이 한 몫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핍이 야기하는 불행은 비단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경험의 가치 상실’을 지적한다. 당시에는 신문, 잡지와 소설이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자리하게 되면서, 이야기라는 전통적 구술 매체가 쇠퇴하게 되었다. 벤야민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경험이 전달되고 공유되며, 그것이 다시금 이야기됨으로써 삶에 대한 지혜와 격률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경험의 공유는 청자가 전달받은 이야기에 스스로 동화되는 과정을 전제로 하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매개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는 이야기의 수공업적 성격을 강조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야기의 과정 자체가 갖고 있는 재래적 형식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동화 과정에서 경험 세계들이 교차되어 하나의 ‘직물 Text’처럼 짜인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의 연속은 결과적으로 이야기를 역사의 차원에까지 도달하게끔 한다. 역사는 결국 이야기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에서 보존된 인간의 경험은 ‘자연스러운 역사 Naturgeschichte’의 흐름에 편입되며, 이에 따라 개인은 역사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아닌 공동체적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론은 당대에 대한 깊은 유감의 표현이다. 이야기의 지위 상실이 야기한 결과로서 역사 앞에 무력한, 길 잃은 개인의 모습을 이야기에 대해 상론하기에 앞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러한 개인들이 초래한 나치 독일이라는 무서운 비극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벤야민의 시대와 현재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그 역시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를 불가역한 것으로 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논의를 통해 이야기가 개인에게, 그리고 그 개인들이 관계를 맺으며 형성하는 세계라는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다.
차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벤야민적 이야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항상 시스템과 그 안에 살아가는 친구들을 걱정하는 사람이었고, 이를 오롯이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였다. 예를 들어 2012년 <New Home>과 2014년 시작된 ‘한국난민’프로젝트에서 그는 현 세대가 직면한 주거나 청년 실업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재미있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만은 않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머물고 있는 독일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여러 번 접했던 그의 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앞서 언급한 작업들 외에도 기회가 닿는 한 그의 전시나 공연에 참석해 그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보고 들었다. 이 이야기들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나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관람객들과 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전시 혹은 공연은 사람들을 그의 이야기로 초대하는 자리였으며, 그 안에서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단순히 이를 수용하는 관객의 위치를 벗어나 그 경험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던진 화두, 즉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즉각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경험이 앞으로의 삶에 대한 작은 표지가 되어줄 수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 표지들이 모인다면, 우리가 만든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데에는 차의 작업들이 참여를 요구하는 프로젝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서 첫 번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분명히 어떤 메시지를 단순히 제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감상자로부터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그리고 감상자가 어떤 반응을 내놓는 순간, 그는 수동적인 관객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로 변하게 된다. 내가 본 차는 이러한 단계까지 작업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작품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불확정의 상태로 전시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작가의 입장에서는 위험하거나 혹은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는, 적어도 내 눈에는 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참여자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감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작업을 매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이를 통해서 작업을 매개로 모인 모든 이들은 함께 이야기의 장을 만든다.
그의 작업이 참여를 권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 외에, 영상을 주된 형식으로 작업을 한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영상은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 예술 형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관계를 맺는다. 회화 작품이 관객과 일대일 관계 하에 수용되는 반면, 영상의 경우는 다수의 관객이 집단적으로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화나 조각 작품의 감상이 주로 시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면에, 영상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에 자극을 전달하는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영화를 새 시대의 이야기 매체로 규정한다. 그는 영화가 전달되는 방식이 고전적 이야기 방식과 같이 ‘집단적 수용’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 그리고 움직이는 이미지가 촉각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그 결과로 관객이 작품에 집중하거나 몰입함으로써 단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한 정신의 시험관’으로서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는 점을 밝혔다. 우리는 벤야민의 논의에서 가능성에 머무른 것들을 차가 펼쳐놓은 이야기의 장에서 실재로서 마주하게 된다.
차의 작업에 빠지지 않는 음악도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 음악들을 통해서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이끌려 참여하게 된다. 이미지와 문자가 결합된 영상에 음악이 더해져 그의 이야기로의 초대는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018년 전시장에서 공연되었던 <BGM>의 음악들은 각자의 제목 이외에도 만들어진 장소와 시간을 밝힘으로써, 자신들이 차가 머무른 시공간의 산물임을 분명히 한다. 음악은 음계에 입각한 음의 배열이지만, 청각을 통해 울림으로 전달된다. 이러한 울림은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청자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전달자와 수용자는 정서적 공명을 통해서 문자나 이미지를 매개로 했을 때와 같이 일방향적, 수직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기에 결국 차의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은 그가 당시 그곳에서, 혹은 그 경험을 상기하며 떠올린 정서들을 잘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 교감을 토대로 서로를 더욱 긴밀히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는 영상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 및 문자와 함께 어우러져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나는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누기를 즐겨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의 연락을 받았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으며, 하물며 언택트가 강요되는 요즈음에 또 한 번 그와 이야기 나눌 수 있음에 기뻤다. 이 글은 차지량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나의 이야기로의 초대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록 나의 이야기는 차의 이야기처럼 매력적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 어느 곳에서 다시 한 번 나의 친구와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곳에서 만날 모두가 건강하기를.
2020년 12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친구 공준석
*공준석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독문학 박사과정 수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