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파업을 파업하기
윤원화
* 금천예술공장 입주작가 비평가 매칭 원고
잘 될 거라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릴 때, 노력한 만큼 결실이 돌아온다거나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말이 궁지에 몰린 불신자의 기도처럼 절박해지고 술자리의 호언장담처럼 자기도취적으로 부풀어오를 때,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어디로도 갈 수 없을 때, 우리는 파업을 하게 된다. 2020년 여름, 나는 예술 파업의 역사에 관해 리서치하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시절이었다면 그 리서치는 예술 노동에 관한 책과 세트를 이루는 또 한 권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그런 리서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내가 파업의 선례를 뒤졌던 것은 정말로 파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파업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일을 멈추는 것이라면, 그것은 파산이나 은퇴보다 오히려 퇴근이나 휴가에 견주어 볼 수 있다. 물론 파업은 휴가가 아니다! 일을 멈추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그대로라면 그 멈춤은 의미가 없다. 파업은 일을 규정하는 질서를 벗어나 그것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행위, 스스로 일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파업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당신은 파업을 하더라도 일을 멈출 수 없다."
파업이 업무의 생산적인 중단이라는 발상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 일을 하지 않을 때조차 성과를 내야 한다니, 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나? 그러나 예술에 연루된다는 건 실제로 어떤 일을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시위대처럼 당신의 시간을 점거하고 경로를 굴절시킨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잠시 멈춘다는 점에서 이미 일종의 파업인데, 나는 그 시간의 작동 방식과 효용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일하기를 멈춰야 했다. 파업을 파업하는 것은 단순히 점거를 푸는 것이 아니라 파업이 직업이 되는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차지량의 작업을 파업의 기예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Strike, Sync〉에서 자기가 거쳐온 시간의 기록을 계속 업데이트 되는 "파업 이력서"로 규정했다. 예술이 파업의 수단인지 표적인지 아니면 목표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서 시류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작은 파업 또는 태업의 형태들을 조직하곤 했는데, 이런 모임들은 파도에 삼켜지지 않기 위한 가상의 구명정이기도 했지만 기껏해야 바위의 윤곽을 일부 드러낼 뿐인 연약한 달걀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단지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로 극장을 가설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의 연기자이자 관람자이자 연출자가 되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탈출의 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극장을 파업의 장소로 그리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꿈속에서 파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일요일에 일하지 않으려면 이 일을 그만두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파업이 직업이 된다는 것은 일의 외부를 구획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작가가 소리 없이 말을 건네는 일련의 비디오 작업을 보는 것은 일이 아닌 동시에 일이다. 당신은 하나의 삶에서 지쳤을 때 또 다른 삶으로 피난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은 끊임없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던져지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적 파괴가 거의 섭리가 된 세계에서 이것은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다. 2012년 가을, 내가 조금씩 번역하고 있었던 결국 출간되지 않은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의미의 퇴각. 인류가 새로운 생활 프로그램을 고안할 겨를도 없이 집단적인 생활 프로그램이 해체되는 사회적 상황. 두 발로 삶을 헤쳐 나간다." 마지막 문장은 '처세에 능하다'라는 의미의 관용구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선다'라고 고쳐쓸 수도 있고, 어떤 사전은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라고 의역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쓴 저자는 평생 자신이 속한 세계를 투명한 꿈으로 고쳐 쓰는 일을 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했지만, 책상 앞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10년 전의 나는 그것을 이상한 형태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 사이의 시간을 문서화한다면, 첫 페이지에 들어갈 표제는 '파업의 역사'보다는 '새롭고 잘 보이지 않는 과로의 역사'가 더 적절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차지량은 이 시간을 매듭짓는 몇 가지 방법을 실험해 왔다. 이는 지난 시간을 현재에서 잘라내는 것도 아니고 모든 순간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행적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9년 겨울, 그는 여태까지의 기억을 담은 데이터 뭉치를 비행기 형태의 멀티미디어 극장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뜰 수 없고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없는 또 다른 겨울이 왔다. 이 예상치 못한 파업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극장을 업데이트 하고 몇 개의 시청각적 트랙을 추가하여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라는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여전히 기록물의 형태를 빌린 운송 장치처럼 보였다. 노래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을까? 그는 한동안 이렇게 질문하는 것처럼 이 앨범의 한 트랙을 주변 사람들에게 뿌리고 다녔다. 〈Surfing〉이라는 제목의 이 트랙은 앨범 내에서 어둡고 잘 보이지 않는 공간과 빛과 이미지로 가득 찬 공간을 잇는 막간극으로 기능하지만 선명한 화살표를 그리진 않는다. 귀를 짓누르는 비행기의 백색잡음과 기차의 무관심한 덜컹거림을 섞어 놓은 듯한 음향적 풍경 속에서, 당신은 턴테이블의 바늘 끝에 내려앉은 날벌레처럼 과거의 흔적이 진동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환영이지만 실제로 당신이 그 진동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환영이 아닐 것이다. 원한다면 당신은 그 장면에서 걸어나갈 수도 있다. 주파수들의 숲속에서, 노래는 그런 갈림길을 개방한다.
윤원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문화 연구자, 비평가, 번역자다.
전시 공간을 실험실처럼 써서 몸과 이미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시간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 작동 중인 역사의 모양을 고쳐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사이클로노피디아』,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이 있다.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