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www.artscene.co.kr/1576
119 구조대 공간에 들어서 본 건 ‘여기’가 아닌 ‘저기’, 곧 한강 위 오리 배에 탄 난민들이었다. 미래에서 온 난민의 입국을 허용하는 협상의 자리에서, 그것과 거리를 좁힐 수 없이, 멀리서 중계되는, 매우 미소하게나마 시차를 허용하는 지연을 거쳐 그것과 마주하는 것이다. 구조 보트를 구동시킬 때 흔들림을 경험하고 전체적으로 땅에 뿌리박지 않은 공간에서 관객은 응시 대신 기다림과 지루함을 겪는, 일시적인 폐쇄 공동체의 운명을 띠게 된다. 이러한 답답하고 어두운 공간은 결국 차지량 작가가 미래로 전이한 현실의 알레고리를 실제적으로 체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난민 협상의 타결을 보기보다, 이 화면이 언제 끝날지가 기다림의 끝으로, 그 생명력은 곧 보이지 않는 미디어의 암묵적 권력에 있는 게 더 정확하다. 거리만큼이나 중계되는 것으로부터 축소된 난민의 지위를 결정하는 찬반의 다수결 투표는, 우리를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위치시키면서 우리(의 후손)이기도 한 타자-곧 이들의 장소는 우리 현실 바깥이 아닌 우리의 미래의 자리다-를 결정하는 역할을 주는 것인데, 이는 타자-미래-의 시간과 구체적 앎(의 증거)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난민 협상과 같은 타자의 현실 영역으로의 수용에 대한 타협이 아닌, 오히려 그것의 부인否認과 망각을 선택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에 가깝다. 곧 미래의 시간을 현실적 증거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또는 그 시간의 문을 닫고 현실을 봉합할 것인가의 물음은, 미래를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 그들이 말한 미래로의 시간을 유예하느냐-현실과 미래의 간극을 두느냐- 또는 현실을 미래로 연장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했다 해도 의문이 남는 것은, 현재에 초과 잉여된 시간과 관점을 가진다면 삶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가령 미래 난민들은 우리와 같이 사라지는가, 마치 판타지처럼-우리가 현재를 바꿈에 따라- 점점 지워져 갈 것인가.
전자의 측면이 더 우세했던 것으로 보임에도, 난민 대표로서 퍼포머 차지량이 협상을 거절한 것은, 이러한 협상의 현실 절차를 난민 바깥의 외부 영역으로 상정하며, 이 중계의 권력의 의도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했다(그 멀쩡한 화면에 균열을 내는. 곧 일종의 ‘얼룩’을 지움으로써). 차지량은 협상을 거부하고, 수면에 잠겨버림으로써 화면에서 사라져 중계된 현실 바깥으로 멀어지며 화면을 폭파시킨 셈이었고, 보이지 않는 시간에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임시 정박했으며,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경계에서 삶-죽음의 순간을 구성했다. 이는 미래를 현실로 바꾸며 그 미래의 장소(로서의 장소성)를 은폐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기형적 미래에의 우리의 후손을 결과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음은, 구자혜 작가/연출의 <디스토피아>를 생각나게끔 한다. 여기서 세대와 생존의 문제는 급진적으로 직결되어 나타나며, 우리는-특히 더 앞선 세대일수록- 미래의 세대를 도륙하지 않을 수 없는 가해자로 자리하게 된다.
그렇다면 차지량이 말하는 디스토피아는 무엇일까. 이는 가상의 미래 시나리오 기법으로 쓰인 것인데, 시간을 알 수 없는, 온갖 현실의 전거들이 뒤얽혀 있는, 말하자면 뒤엉킨 차지량의 머리에서 나온 자동 기술적 미래상, 사실은 현실의 부정적인 반영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팔만 팔천 원씩 세금이 인터넷상에서 자동 납부되는 세대는, 88만원 세대를 상기시키는 현실 흔적의 개념적 차용에 다름 아니다. 초-인류 자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경계 없는 세계의 전제가, 어느새 네오 봉건의 국지화된 정착민들의 모나드들로 전환되는 것처럼, 세계의 시간적 변화 흐름의 굴곡이 뚜렷하다.
한편, 한동안 길게 진행된 차지량의 내레이션은, 곧 그가 구성하는 연극(?)의 전략, 이미지의 프롤로그 이후 목소리-텍스트와 행위-퍼포먼스의 분절 또는 그 이후의 접합의 과정과 맞물려 있는 듯 보인다. 굳이 그것을 여기서 들었어야 하는가의 물음이, 그 종잡을 수 없는 텍스트에 대한 불이해와 맞물려 관객들에게서 새어나오는 듯했는데-실제 누군가가 밖을 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연극이라고, 아니 연극이여야 한다고 믿었던 이는-, 앞서 이러한 닫힌 공간에서의 바깥 현실의 축소된 전개의 전달 받음은, 이 암울한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미래와 타자의 뚜렷한 경계 지형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래에서 온 난민의 위치에서 차지량은 현실 국회의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동참 의사를 물었고, 단 한 명의 참여를 끌어냈다. 이곳 현실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의견으로, 현재를 메타적으로 구성·설명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렇게 미래라는 프레임을 기약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과연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현재를 바꿔야 한다보다 암울한 미래를 체현하는 현재에 입국할 권리를 미래의 난민으로 위치 삼아 가상으로나마 포기하는 차지량의 행위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타자로 여기며 삶을 해체해야 할 것인가, 결국 차지량이 협상을 불응한 것은 현재에 대한 기대나 요구와는 애초 거리를 두고 있었음으로 드러난다.
이는 현장 구조요원들에게도 그것을 미리 이야기하지 않아 뜻밖의 사건으로 나타났다. 결국 소수의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는 대신, 차지량 구출 작전을 보기 위해 배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것은 죽음인가, 그것은 단 하나의 순간인 퍼포먼스 이후를 보기 위한, 흥분됨의 감정 양태를 띠고 있었다. 차지량은 곧 끝을 기약했었고, 그 끝을 내재적인 질서로 가져가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진짜 생생한 구경거리의 일부에 된 것에 가깝게 됐다. 결국 차지량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디스토피아로부터 극단적으로 도피해야 함을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협상을 요구할 어떤 권력, 이를테면 정부 혹은 권력에 대한 정치를 포기하는 것으로. 그렇지만 이는 다시 단 한 명의 정치인이 있었기에 현실 정치에 대한 저항적 테러는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방도가 있는 것일까.
그의 실제적 추락을 통한 상징적 죽음은, 단 한 명의 정치인의 응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수많은 응답하지 않은 정치인들을 향하며, 밀폐된 공간에 들어선 순간 전시된 흰 바탕에 배의 침몰과 망각이 아닌 기억의 작용으로서 수면이 등가 되는, 세월호 사건과 결부된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된 이미지들이 자리하는데, 무력한 죽음에 대한 무력한 포기, 그 현실 자체에서 눈을 돌리겠다는 단말마 같은 의지의 결단으로서, 결국 어떤 한 순간으로 영원히, 도돌이표처럼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결국 어떤 죽음의 등가로서 퍼포먼스의 완성은 퍼포먼스의 포기이며 협상 자체를 무효로 만드는 동시에 영원한 난민의 지위를 영속적인 부유의 한 지점에 닻을 내리는, 곧 사라짐으로써 망각되는-사실 기억되는-침묵의 발화 행위이기도 했다. 결국 죽음을 (망각에서) 기억으로 바꾸는 행위 하나가, 세월호 사건에 부착되는 현실의 한 지점에서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