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10기 입주작가 대상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원고
지난 해 봄 한 케이블 방송이 기획한 <아트스타 코리아(Art Star Korea)>(이하 아스코), 라는 현대미술기반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SNS를 달궜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았던 아스코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현대미술을 예능프로그램으로서 흥행무대 위에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상업방송이 상상하고 있는 ‘현대미술가 像’이었다. 이 스테레오 타입은 예선을 걸쳐서 본선을 통과하여 방송에 선정된 작가들의 외모나 성격에서 그리고 그들의 작업 스타일에서 드러났다. 아스코 제작진은 미지의 세계인 ‘현대미술’영역에 처음 상륙한 개척자처럼 호기심의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카메라의 앵글에 가장 먼저 포착된 작가는 차지량이었다. 아스코 첫 방송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차지량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예술보다도 ‘조인성 닮은’ 외모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상업방송이 제시한 성공적인 현대미술가 상에 다가가기 위한 참여자들 간의 경쟁이 시작됐다. 이런 저속해 보이는 예능게임을 청년작가들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를 동시대 예술에 대한 모독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을 만큼 방송은 선정적으로 기획되었다. 이런 방송에서 1억 원의 상금을 노리는 예술가들의 경쟁에 비판적이었던 차지량은 첫 번째 미션에서 ‘시스템의 역할과 개인의 태도’라는 주제로 미디어와 퍼포먼스를 접목시킨 작품은 선보였는데, 방송에 대한 메타 방송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미디어를 활용했다. 결국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나를 탈락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아스코’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것을 규칙으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발적 탈락 요구’가 하나의 작업으로 제안된 상황은 이 프로그램을 일시적으로 미궁에 빠트렸다.
또한, 메타방송으로 제작된 참여자들의 숨은 이야기가 별도로 공개되면서 ‘내부 고발자’ 차지량이 제시한 게임은 윤리적인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facebook.com/CJ.realTV) 하지만 반전은 심사위원들이 그의 작업을 ‘훌륭한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고 다음 라운드로 진출 시키면서 발생했다. 차지량의 수행적인 예술(Performative Art)이자 상업방송을 상대로 벌인 정치적인 게임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도발이 예술의 제도적 투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아방가르드가 아니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것’이 된 지금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 아방가르드의 승승장구 시대에서 ‘전위적 시도’는 흥미로운 반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예능프로그램에 포섭되었다. 1억 원의 상금을 받아서 개인적인 취향으로 개인이 운영하는 ‘차지량 예술상’을 만드는 그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졌고 그가 그동안 후기산업화 시대에서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의 가치를 꾸준히 탐구했던 작가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같은 해 봄 3월, 해마다 열리는 봄 페스티벌에서 우리는 차지량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회화작업으로 시작해서 최근 영상과 설치, 사진 더 나아가서는 퍼포먼스 작업으로 자기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차지량이 국내 대표적인 실험공연예술행사에 초대된 것이다. 이 페스티벌에서 차지량은 <한국 난민 판매 : Korean-Sales.org>를 통해서 신청한 망명신청자들과 <뉴 미디어를 장착한 체념이 광장을 가로 지른다>를 선보였다. 앞서 아스코의 출연이 개인 예술가로서 상업방송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위한 시도였다면, 이 공연은 ‘국가 시스템’에 관한 차지량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제도적인 공연장을 탈피해서 사회 정치적인 문맥을 과감히 접속해온 이 페스티벌의 전통은 차지량의 작업에 잘 들어맞았다.
차지량은 페스티벌의 관람객들과 자못 숙연해 보이는 일군의 무리들을 시내 피시방에 집결시켰다. 음습한 피시방 한구석에서 빛을 밝히고 있는 모니터 화면 위로는 국가에 대한 이들의 절망이 낱낱이 기록되고 있었다. 여기 모인 개인은 국가에 대한 다각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국가로부터 개인이 입은 폭력적 피해 사실은 누구에게든 밀고 되어야 했다. 이 체념의 기록들은 차지량이 운영하는 <난민 국정원>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사이트에 접속해서 자기 신상정보와 망명사유를 기록한 망명자들은 시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올랐다.
국가를 체념한 이들을 태운 리무진은 시청 앞 광장을 지나 광화문으로 이동했다. 리무진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세상은 넒은 파노라마처럼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움직였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희망의 붉은 물결, 분노의 촛불이 내뿜었던 열기, 노란 국가적 죽음의 슬픔이 망명자들의 눈가로 스쳐지나갔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소용돌이 쳤던 요구들은 깊은 절망으로 되돌아 왔다. 다시 돌아보면 이곳은 근현대사를 가로 지르는 국가권력의 폭력과 국민들의 굴복하지 않는 저항이 끝없이 충돌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아직도 국가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도 구조하지 않는 표류자의 공허한 외침 같은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푯말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희망으로부터 체념으로 이어지는 강처럼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흘렀다. 이 강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차의 장벽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강둑은 체념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강은 둑을 범람하지 못했다. 그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리무진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다시 못 볼 여러분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더 이상의 최악은 없을 이곳에서,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곳에서 우리는 혁명가도, 계몽을 위한 계몽주의 운동가도, 대안을 추구하는 이상가도, 교란을 위한 정치가도, 내란을 일으킬 선동가도, 분란을 조장할 테러리스트도 없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사람들은 축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샴페인을 터트리며 망각을 유도했지만 이제는 그 약발이 듣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균형은 무너졌어요. 아무도 그들이 흘리는 정보를 믿지 않죠.”
국가에 체념한 개인들이 국가의 원심력 바깥으로 탈주하는 순간이었다. 차지량의 공연 <뉴 미디어를 장착한 체념이 광장을 가로 지른다.>는 리무진을 타고 청와대까지 난민 신청을 하러 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 공연은 10월 3일 부산에서 다른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부산에서는 지난 해 비엔날레 감독 선임과정에서 파열음을 내더니 결국에는 대안적인 형식의 “무빙트리엔날레”라는 행사를 출범시켰는데, 차지량은 이 행사에서 비중 있는 공연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부산항에서 출발한 난민 신청자들을 데리고 ‘체념이 극단에 이른 2014년 대한민국’을 떠나 새로운 이상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식들로 이루어 졌다.
차지량의 작업들은 ‘일시적인 퍼포먼스’같지만 지속적으로 연결됐다. 그가 개설한 <한국 난민 판매 : Korean-Sales.org>에 모인 사람들은 이 일시적 퍼포먼스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이자 난민 국정원장 차지량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한국난민대표”를 선출하는 퍼포먼스로 구성된 이 공연에서는 지난 봄 광화문에서 벌였던 퍼포먼스를 한반도의 바다 국경 끝까지 확장했다. 지난해 4월 수 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는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던 누리마루 호 위에서 펼쳐진 공연에서 다시 환기되었다. 이 사고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좌초했는지 보았다. 사고의 수습과정이나 구조과정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국가는 없었다. 지난 4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그 어떤 국민이라도 무정부주의 상태에 놓이는 유래가 없는 ‘무 국가 상태’를 경험했다.
나라를 잃은 난민 129명을 태운 배는 하염없이 이상 국가를 향해서 나아갔다. 이 배 위에서는 이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정치적인 행사가 열렸다. 국가 이미지를 판매하며 살아온 '국가 사랑' 기호 1번, 10년 째 단식 했고 난민을 위한 단식을 시작하겠다는 기호 2번, 외국에서만 살아왔으면서도 '토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기호 3번과 국민의 외면 속에도 복지 국가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기호 4번,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꿈꾸는 중 2병을 앓고 있는 기호 5번 후보까지 모두 5명의 후보가 왜 이 난민호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지 연설하는 렉처 퍼포먼스가 이 공연의 중심에 있었다. 난민대표를 선출하는 이 퍼포먼스가 국가 시스템의 파국을 역설하고 결국에는 체념하는 것을 통해서 표류하는 국가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면서부터 나의 선택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국민의 주권’은 국가를 체념하는 이들에 의해서 성대한 의식과 함께 버려졌다.
이 체념의 축제는 어두움이 찾아들 때까지 지속되었다. 관람객들은 대한민국의 영해까지 도달했다가 복귀해야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에서 국가 시스템에 맞서고 있는 ‘개인’의 무기력하고 나약함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차지량이 아스코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시도는 ‘일시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국가권력과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주권자인 개인의 선택가능한 원초적 권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개인의 권력이 망각되는 곳에서 국가의 권력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권력에 대한 망각과 그 권력의 크기는 서로 긍정적으로 상응한다고 했다. 아무도 권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곳에서 권력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존재하며 그 자명성으로 인해 확실하고 거대하고 권력이 테마화 되는 곳에는 이미 권력의 몰락이 시작된다고 했다. 거대한 시스템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편을 택하는 체념에서 과연 개인은 시스템을 망각할 수 있을까?
백기영(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수석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