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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아트행동주의', '아티클'에 게시된 차지량 작가론

자본주의는 더 이상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과 희망의 어떤 메시지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안녕하지 못한’ 삶으로부터 청년 세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제가 구획한 극한의 노동 조건 속에서 비정규 알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른바 불완전 노동자를 지칭하는 ‘프레카리아트’들은 그들 스스로 기반한 삶의 조건을 되살필 여유조차 없이 매일매일 생존의 하루살이 현장으로 내쫓긴다. 그 파국의 전야에 난 그를 쓸쓸이 만났다. 시스템 붕괴와 나락의 한가운데서 탈출하려 했고, 그런 이유로 끝내 스스로의 존재를 현실로부터 삭제하려 했던 작가 차지량을 만났다. 삶의 체념 이후 또 다른 생의 기획을 세우기 위해 떠나는 그와 난 한 이름모를 지하철 지하보도 커피숍에서 그렇게 조우했다.

 

작가 차지량은 내가 인터뷰했던 작가들 중 가장 어린 축에 낀다. 그의 세대적 감수성 때문일까. 설치, 퍼포먼스, 다채널 비디오 영상, 인터넷 프로젝트 사이트 등 그의 표현 형식에서 재기발랄함을 느낀다. 미학적 문제의식도 연배에 비해 사뭇 진지하다. 이제까지 그가 주되게 고민했던, 세대의 정치경제적 조건, 공간과 도시, 미술 시스템과 창작조건에 대한 비판 등은 그의 작업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개입의 주제들이다. 차지량의 미학적 슬로건처럼 줄곧 등장하는 설명들, 예컨대 “동시대 시스템의 고립을 겨냥하는 개인”과 “시스템에 상상력을 제안하는 개인”이란, 결국 바로 파국을 앞둔 우리들 각자가 당대 시스템에 마주해 새로운 대안을 위해 어떤 개입과 교란의 상상력을 발동할 것인가의 문제로 보인다.

 

세대와 현장의 문법 익히기

 

초창기에 그의 작업은 설치 등 공간미술에 주로 천착했다. 예를 들면, <12시를 위한 회화>(2007)는 홍대 프린지 페스티발에 참여해서 수행했던 조형 설치 작업이었다. 하늘에 나비 모양의 조형물을 띄우고 그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효과에 착안했다. 그 그림자를 스쳐가는 청춘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기 위한 일종의 ‘응원 메시지’였던 셈이다. 그는 군 제대 후에 미대생들의 부푼 꿈을 채워줄 ‘기대감에 따른 금전지불’의 통과의례로 행하는 ‘졸업전시’를 거부하는 반대 운동을 벌이다 결국 학교까지 중도에 그만둔다.

 

차지량에게 2008년은 작업 변화와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전기가 되는 해이다. 그는 충무아트홀 <동대문운동장> 기획공모에 우수상으로 당선된다. 공모 작업 주제에 대한 고민은 이제까지 공간 연출에 몰두하던 방식에서 시스템에 가려진 현장의 목소리와 행동을 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포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메이저리거를 꿈꿨던 한 ‘청년야구왕’이 서울로 상경해 야구의 꿈을 접고 당시 동대문운동장의 재건축 건설인부로 일하면서 소싯적 꿈을 잃고 결국 주어진 체제 속에 침잠해 가는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가 눈여겨보지 못했던, 시스템에 억눌린 현장의 살아있는 면면을 영상에 담으면서 그 중요성에 점차 눈뜨게 되었다.

 

당시 차지량은 쌈지의 제안으로 첫 개인전 <이동을 위한 회화>(2008)전도 준비해 열었다. 이는 동대문 작업과 졸업전시 반대시위에서 보여줬던 주제의식, 즉 주류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체제의 비주류 캐릭터들의 삶의 현장 속 모습을 보다 구체화해 담아낸다. 미대생 차씨의 구직 상경기란 서사 구조에 기대어, 이미지 설치작업 형식으로 풀어가는 작업에 해당한다. 동대문운동장의 청년야구왕 만큼이나 미대생 차씨 역시 시스템이 강요하는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미술학도 차씨는 명동에 임시 거처를 얻어 안착하려 했으나, 이도 무단거주로 또 다시 짐을 싸고 어디론가 기약없는 이동을 준비해야 하는 고단한 운명에 처한다. 한 곳에 정주할 수 없는 운명의, 끊임없이 표류하는 오늘날 청년세대들의 우울한 정서가 묻어난다.

 

낭독, 연주, 퍼포먼스, 연극 등이 어우러진 ‘낭독 퍼포먼스’ 또한 차지량 작가가 수행하는 주요 작업 중 하나다. 그는 특정화된 프로젝트를 비디오로 기록하는 과정과 함께 보다 많은 관객과 특정의 사안에 대한 군집화된 이벤트를 열어 여러 장르 형식 속에서 그들과 상호 공유 지점을 확인하는 식으로 낭독 퍼포먼스를 열고 있다. 일례로, 그의 가까운 친구들과의 낭독회로 구성된 <꺾어진 청춘낭독> 등은, 이후에 동시대적 고민을 함께 하는 여러 동년배간의 상호 세대간 접점을 보려했던 <세대의 발견>(2009)과 같은 낭독공연으로 확장, 실험되었다.

 

작가 차지량의 두 번째 개인전 <세대독립클럽>(2010)은 비슷하게 세대간 연대와 세대들에 대한 관심 확장에서 기획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규정화된 청년 세대 용어인 ‘88만원 세대’ 혹은 기성세대에 의해 억압적으로 규정된 청년세대의 담론 규정에 크게 회의했다. 외려 그들 스스로 세대적 속살을 드러내는 주체적 담론 구성을 위해, 차지량은 ‘세대독립’의 클럽 성원을 규합하려 했다.

 

클럽 구성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자 청년 세대군이었다. 이들과 온라인을 통해서 이메일, 메신저, 블로그를 통해 상호 소통하고 모임을 기획하면서, 파국의 시기에 세대 주체적 욕망을 표출하고 점증하는 세대적 갈증을 해소하려는 구체적 퍼포먼스 실험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관객 참여형 ‘번개’모임을 통해 ‘OFF-LINE: 자체발광’, ‘은둔하는 세대의 캠프파이어’, ‘미드나잇 퍼레이드’ 등 집단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는 이를 다채널 비디오에 담아, 세대적 감수성, 즉흥성, 자율성, 유희성의 측면들을 구체적으로 잡아내려 했다. 차지량의 <세대독립클럽>에 등장하는 ‘촛불남’과 ‘클럽야광녀’는, 중요한 세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즉 이들은 오늘날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청년세대의 일그러진 형상이란 점에서만 크게 두드러질 뿐, 둘 다 우리를 비추는 자화상에 다름아니다. 촛불남은 그저 ‘88만원 세대’를 통해 투영된 청년 세대이거나 체제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 과잉화된 정치의식으로 똘똘 뭉친 역할자이다. 그 반대편의 클럽야광녀는 소비주의적 욕망과 밤문화의 포로로 현실을 애써 잊으려 하는 비정치적 역할자다. 결국 이 둘이 혼종된 모두에서 우리는 동시대 청년 세대의 특성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세대 연대, 그리고 시스템 교란 실험으로

 

<일시적 기업>(2011)은 차지량의 세 번째 개인전이자, 이전 작업들에 비해 세대 해석의 범위도 확대된다. 단순히 청년 세대를 넘어서 시스템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을 지닌 사회적 소수자들과의 교감과 이들과의 확대된 공감대 형성을 주목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시스템에 대한 교란이나 저항의 고민들도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참여 관객들과 함께 그는 대기업 사무실을 야간 침입하거나 여의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테러 퍼포먼스를 감행한다. 차지량은 <일시적 기업>을 “자본주의적 기업질서의 고립을 겨냥하는 프로젝트”로 삼아, 웹사이트 개설, 퍼포먼스, 전시, 극장상영 등의 표현형식으로 다변화하면서 그 메시지적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일시적 기업>에서 그는 거대 기업들의 용어법을 가져다가 일부러 유치한 개념들을 만들어내고 관객들과 삐딱하고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개시했다. 예를 들어, ‘Massive Capitalism’이란 개념은 그에게 개인의 질서가 기업에 흡수된 체제를, 기업 ‘팀’(‘T.E.A.M.’)이란 용어는 일반적 기업조직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자정 시간대에 모여 체제에 분노를 폭발하는 그룹’(Temporary Exporting Angry Midnight)이란 뜻으로 치환된다. 이 일시적 기업 ‘팀’이 자정의 ‘오티’(O.T.), 즉 ‘오피스 테러’(Office Terror)를 감행하는 주체이다. 일면식 없이 모여든 자발적 관객들은 <일시적 기업>의 실질 구성원이 되어 역삼동, 종로, 여의도에 늦은 밤 몰려다니며 테러 퍼포먼스를 벌인다. 오피스 테러란 이렇다. 팀원들은 몰래 기업 빌딩에 잠입해 제각각 만든 이력서를 사무실이나 그 입구 등에 붙이거나 혹은 사장실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간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로젝트에서 이용됐던 면접 질문지를 빌딩 야근자에게 주고 오는 행위를 벌인다. 무엇보다 대기업 건물 옥상에 올라가 벌이는 참여 관객들 각자의 물총과 폭탄으로 여의도 도심을 폭파하는 시각적 행위는 전체 퍼포먼스의 극적 효과를 드높인다.

 

차지량은 관객과 수행했던 이 실험적 사례들이 뭔가 대단한 예술 저항의 방식으로 오독되는 상황을 경계한다. 우리의 그저 무기력한 반체제적 공격성에 혹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나 배설의 향연에 즐거워하지말고 좀 거리두기 할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자본주의적 화법을 활용한 이야기 구성과 일시적 저항”의 전술로 읽히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오피스 테러 등의 사례들을 “참가자 스스로 구성하는 진행방식”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다른 현장에서 스스로 확장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작업”으로 확대해 보거나 재해석하길 바란다. 결국 자신의 작업들이 직접적 저항의 실제 표현으로 해석되기 보단 좀 더 가능한 대안적 미래 설계를 위한 상상력 실험 내지 대안담론 구성의 확장으로 보여지기를 선호하는 것이다.

 

파국의 나락에서 삶을 길어올리기

 

<일시적 기업>에서 보여줬던 여의도 증권가 자정테러에 이어서, 차지량은 2년여에 걸쳐 무단으로 빈 주택에 들어가 자본주의의 거주 조건과 세대 생존의 문제를 집중화해 다뤘다. 그의 최근 네 번째 개인전 <뉴홈New Home>(2012)은 이의 결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도 미드나잇 테러와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일단 온라인으로 자원자를 모집해 팀을 만들어 자정이 넘은 시간 미분양 가옥 혹은 빈집으로 들어가 동트기 전에 나오기까지 무정형의 자율적 퍼포먼스를 벌이고 나오는 방식이다. 그의 촬영은 다세대주택, 원룸에서 신도시 아파트 거주지로 이어졌다. 관객이자 세대 주체들 스스로 자본주의 도시계획에 관여하지 못하고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되는 세대 생존의 문제와 도시 속 주거문화를 직접 빈집에 무단 침입해 체험하는 기회를 얻는다. 어쨌거나 늦은 밤 빈집들에서 참여 관객들의 상황은 너무도 무기력해 보인다. 전기나 급수가 전혀 되지 않는 빈집에서 그들은 야광봉을 방바닥에 던져 빛을 만들거나 을씨년스런 방바닥에 은박지 깔개 위에 몸을 뉘여 쪽잠을 청한다. 이들에서 더 이상 꿈과 미래는 없어 보인다. 삶의 체념조차 어려운 현실의 모습이다.

 

<일시적 기업>의 재기발랄한 대안 실험과는 달리 <뉴홈>은 파국에 직면한 세대의 허망함과 극단의 체념적 정서가 느껴진다. 작가 스스로도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추락 경험에 직면한다. 두 채널 영상 작업, <탐정파업: 동기화>(2012)는 그의 당시 개인사가 잘 녹아 있다. 당시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불안정한 도전과 상실감에 봉착하면서 스스로 직업적 작가 행위를 그만두고 체념의 극단으로 몰아가려 했다. ‘탐정파업’이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탐정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작가 차지량은 차분하고 단단했다. 그는 체념 이후의 삶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시스템이 주는 억압의 무게와 개인이 지닌 삶의 무게로 인한 이중고에 더 이상 삶의 희망이란 부질없어 보였을 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극단의 체념을 삶의 에너지로 전화하려 한다. <빈집>의 우울함 속에서도 관객들과 함께 그는 항상 동이 터올 무렵 이동식 장판이나 종이로 커다란 종이학을 곳곳에 접어 남기거나 날려 보내는 의식을 진행했다. 극한의 파국에 대한 체념적 상황인식이 외려 대안과 실천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있어 보인다. 차지량의 작업 끝에 등장하는 종이학이 결국 각자 삶에의 의지일 터인데, 그의 종이학이 앞으로 어떻게 날개짓하고 변할 지 궁금한 대목이다. 

 

이광석(서울과기대 디지털·문화정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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