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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대상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원고

21세기 한국의 비트세대를 이끄는 일인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차지량을 보고 있자면 비트닉(Beatniks)적 방랑자의 기질이 엿보인다. 게다가 그의 최근 작업들은 힙스터(Hipster)스럽다는 기분까지 든다. 작가 스스로가 밝히는바 지금까지 작업이 ‘개인을 데리고 와서 참여시킨 다음 생각하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면, 앞으로는 시스템을 보여주고 ‘시스템만 남긴 뒤 사람-혹은 작가 자신이 될 피사체를 사라지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산업화 이후 미국사회에서 벌어진, 실체 없는 체계에 희생된 개인의 고통이 현시대 우리들의 절망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의문을 그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2004년의 조형미술작품「12시를 위한 회화」이후 줄곧 이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당시의 작업은 설치미술과 참여미술의 경계에 서 있었는데, 작품이 설치된 장소는 오가는 행인 많은 홍대 거리였고, 빛을 이용한 행인들과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애초의 목표였다. 이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홍대 일원에서 진행된 낭독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영상미디어의 영역이었다. 본격적으로 영상 자체를 목적으로 진행된 작업의 시작은 2008년작 「왕년야구왕」에 이르러서다. 충무갤러리 ‘동대문운동장전’의 출품작이기도 했던 「왕년야구왕」은 작가가 캐스팅한 배우가 동대문운동장의 작업에 직접 참여해 ‘진짜’ 주변인들을 끌어들인 후, 주인공인 고교 야구왕과 그의 여자 친구의 드라마가 평행 편집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른바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 참여형의 극영화’라 이를 만한 첫 번째 작업이다. 이후 2008년의 공연「인사동네 사람들」을 거치면서 이러한 ‘연극과 영화의 혼재’ 경향은 서서히 작가 개인의 기존 작업형태인 ‘조형예술의 형식’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그러니 2010년에 이르러 「세대독립클럽」이 탄생한 배경에는 ‘설치미술에서 조형미술로의 전향, 그리고 영상물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 자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고는 2010년 이후 완성된 차지량이 만든 작품 일렬, 즉 「세대독립클럽」(2010)와「일시적 기업」(2011), 「뉴홈」(2012)의 세 작품을 일컬어 ‘성장세대에 대한 트릴로지’라 부르려 한다. 정확히 말해 이들 세 작품이 가리키는 목적은 ‘주류사회의 틈’ 그 자체다. 즉, 대안 제시가 이 작품들의 목적은 아니다. 삼부작 중 특히 「일시적 기업」과「뉴홈」에서 참여자들은 대개 사회와 개인의 영역, 그리고 그 사이의 연계(linkage)로써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의 연계란 미디어를 사이에 둔 놀이의 방식 내지, 사회참여에의 골을 현재로 끌어들여서 미래로 투사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일시적 연대를 통해 주류사회의 틈을 공격하고, 그 과정을 미디어란 언어로 파열하는 것이 이때 관객의 역할이다. 따라서 참여자들의 연계를 통해 사회적 개인의 겉면 하나가 답습되고, 이와 동시에 (다양한 참여자의 비슷하고도 다양한) 매개된 다른 겉면들이 비교되면서 작품은 방향성을 잡아간다. 그러니 사회적 형태의 비교 자체가 이들 작업이 바라보는 일차적 목표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례로 「일시적 기업」에서 작가는 기업의 이름과 신입사원 선발과정, 그리고 사무실에서의 작업 행태에 대해 단지 겉만을 흉내 내고 반복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좀 더 직접적으로 게임과 참여자 간의 갭을 삭제해 나가려는 의도처럼 읽힌다. 이 삭제의 과정을 거친 결과, 마지막 시퀀스에서 발사되는 물총과 그래픽으로 하늘에 수놓아지는 축포의 행진이 풍자(satire)로 느껴지게 된다. 이처럼 사회화의 행태에서 시작해 익살(drollery)과 해학(humor)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과정 자체가 삼부작이 겨냥한 목표이다. 차지량은 작업의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한 작가인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영상만큼이나 ‘온라인을 통해 공지와 자발적인 참여, 그리고 참여자의 행동 자체’도 눈여겨 살펴야 할 것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의 참여형 퍼포먼스를 ‘관객의 도구화’로 읽는 것은 곤란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퍼포먼스 자체를 ‘추상’이라 읽는 편이 낫다. 이 지점에서 차지량 작품의 모더니즘적 성향 일부가 드러난다.「세대독립클럽」의 클립 중 하나인 <미드나잇-퍼레이드> 속의 야광녀나 촛불남의 ‘디지털 캠프파이어’가 대표적 예다. 그들은 당시 사회상의 일부를 표상하는 동시에, 개인의 아픔을 드러내는 행위로써 디지털 라이트를 이용하는 인물들이다. 어쩌면 「뉴홈」의 개별적 방안 꾸미기 역시 그 자체로 다양한 사회적 행위의 개별적 답습으로 읽을 수 있다. 즉, 화면 속 등장인물이 엄밀하게 구조화된 계획 아래에서 생성된 사회의 어떤 '드러난 체계'를 대변해주는 장치가 된다. 보드리야르의 언급을 빌려서 표현하면 이는 기술적 사물에 담긴 본래의 형태인 '추상적 형태'인 셈이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추상, 본래의 의도와 역전된 채, 기술적 계획과도 같은 일종의 추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작가는 웅변한다. 이 폐쇄적이고도 추상적인, 심지어 우리가 깨닫지 못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현실의 아래에 잠재해 있는 ‘근본적인 현실’을 각각의 개별 참여자가 드러낸다. 이렇게 참여한 개인 각각의 행위를 ‘내포된 것들’과 ‘객관적 외연’의 쌍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앤디 워홀과 마르셀 뒤샹을 언급하며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사용한 ‘추상(abstraction)과 현실(reality)’이란 단어처럼, 참여자 행위의 내연과 외연을 우린 차지량의 작업에서 구별해 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소쉬르가 언급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 그렇고, 혹은 사회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생산(production)과 소비(consumption)’의 용어가 그렇다. 전자를 내포적 의미에 그리고 후자를 객관적 외연에 대비시켜 보자. 결과적으로 이런 식의 분류는 차지량 작품에 담긴 개별참여자가 취하는 ‘드러난 행위’가 갖는 의미 층위를 ‘추상, 랑그, 생산’의 내포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게 한다. 즉, 만약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기술이 추상이라면 이들 참여자들 역시 추상이 되며, 우리는 이에 대해 넓은 의미의 '환경을 지배하는, 각 개인에 관한 객관적 관여 혹은 통계'라 이를 수 있다. 비로소 성장세대 삼부작은 기존작품들에 대한 해석의 발판임과 동시에, 앞으로 차지량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할 힘을 얻는다. 이른바 완전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향하는 발판이 이렇게 마련된다.

 

물론 추상표현주의에서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지는 모더니즘 미술의 징표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차지량 작업에서의 본격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색채를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객의 참여, 이들의 연계적인 역할을 아무리 추상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개인 스스로의 ‘개성’을 완전히 삭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편집의 과정에서 일부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일시적 기업」혹은 「뉴홈」을 통해 주지하였듯, 차지량은 영상의 운동성을 편집해 내길 주저하는 작가이다. 그는 길게 찍고 길게 드러내길 선호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품 속 반복되는 행위들은 엄밀히 말해 반복은 아니다. 이들은 반복(repetition)되는 것이 아니라 변주(variation)된다. 다만 편집되지 않기에 강하게 인지되지 않을 뿐이다. 이들 세 작품 모두에서 이러한 변주는 동일하게 드러나는 특성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후반작업에서의 테크닉을 이용해 특정행동이 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주지해야만 한다. 이는 관객에게서 변주에 대한 인지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주라는 표현보다 이 변환적 반복을 우린 ‘집적(accumulation)’이라 부르는 편이 더 알맞을 것이다. 차지량은 온라인을 통해 모은 개인의 특성들을 마치 아상블라주하듯 쌓아 올려, 이를 신사실주의에 대한 승인처럼 부각시켜 드러낸다. 이렇듯 집적이란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자마자 그의 성장세대에 대한 관객참여 트릴로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초엽에 속하게 된다.

 

작품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행위, 다시 말해 연계의 목적 역시 이즈음 다시 환기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퍼포먼스가 추상적 생산이라 일컫는다면, 이는 정확히 말해 상품보다는 좀 더 특별한 발명품, 이를테면 생활에 필요하진 않지만 일종의 ‘아이디어 상품’에 가까운 의미에서다. 이처럼 필수가 아니지만 개인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상품에 대한 특별한 용어를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바로 ‘가제트(gadget)’다. 만일 관객의 참여를 가제트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유용성의 부재나 비일관성과도 같은 기능성의 유무 역시 긍정적으로 사유할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가제트가 현실의 상품들을 비방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작품 속 현실 체계가 ‘실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가제트가 가지는 특성인 ‘욕구의 비합리성’을 전제로 둘 때, 미술적 의미에서의 ‘취향’ 역시 고려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율참여자들의 기능성 유무가 차지량의 작품을 판단할 중요기제가 될 수 없음을 이는 이른다. 물론 이때의 가제트는 대안이 아닌 ‘창구’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취향이 담긴 미적 감각을 전수하는 창구, 참여자 모두를 아티스트로 만들어 주는 창구 말이다. 개별적 예술 창조의 창구를 쌓아올리는 예술, 그리고 과거의 유산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을 위한 창구, 이가 최근 들어 차지량 활동의 지향점이다.

 

 

피에르 마르티노가 브랜드를 택할 때 그러했듯, 차지량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회적 상황들을 마치 친구를 결정하듯 대처하라고 조언한다.「일시적 기업」의 직업 선택이나 테러의 방향, 그리고「뉴홈」의 거주 방식 또는 구조 결정의 과정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집합된 참여자들은 마치 친구를 결정하듯 편안하게 그의 작업에 참여한다. 물론 이때 주어지는 틀은 작가의 고민을 거쳐 고안된 틀이다. 그렇더라도 작가는 사회에서 이미 결정한 이미지를 내밀었을 뿐이고, 빈 공간을 공략하고 관객을 부추기는 것은 참여자 스스로가 맡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스스로 실재의 이미지가 놓치고 있는 사회적 부재들을 참여자에게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극장에서 영상으로 이 작업을 접한 관객들은 과정을 담은 이미지를 '환기하게' 되고, 공연 참여자는 스스로 환기함과 동시에 개별성을 발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참여자와 관람자, 이들 ‘예술의 1,2차 소비자들’ 모두 이런 과정을 통해 ‘추상적이고 유동적인 힘’이 된다. 이 힘의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넓은 의미에서 그 불완전한 일시적 행위는 서서히 누적될(cumulative) 것이다. 차지량 작업의 매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취향의 존중, 그리고 일시적 친구의 발견을 통해 그의 영상물은 살아 숨 쉰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LEE Ji-hyun, 1978~)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 한 후, 프랑스 캉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3회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등단한 후 다양한 매체에 영화평론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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