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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2011년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원고

'일시적 기업'의 창업 목적은 기업 문화에 투항하는 것이다. 개성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저항의 의지를 전람하는 것이다. 창업주이자 '사장'인 차지량에 따르면, 대기업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선택은 '기업'과 '개인'다. '일시적 기업'은 (일시적으로나마) '기업' 대신 '개인'을 선택하기 위한 기업이다. 기업에 불만을 가진 정규 및 비정규 직장인과 구직인, 실직자, 무직자에 이르기까지, 사회구성원의 특성을 기업의 기준에 짜 맞추는 자본주의 문화에 대해 그 어떤 잠재된 혹은 표면화된 불만이나 저항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이 기업에 '입사'를 할 수 있다. 입사 지원자들의 입사율은 100%. 물론 기업 활동은 일시적이다. 이들이 하루 동안 '일시적'으로 벌인 반기업 테러 행위는 대기업 문화에 의해 말소된 개인의 개성을 회복하려는 '일시적'인 방식이 된다. 일시적 사원들의 결코 일시적이지 않은 무기력은 곧 무기가 된다. 무기의 유효기간은 일시적이다. 반기업 활동을 위해 '기업'의 일원이 된다는 모순은 단순한 투항과 전복의 의지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첨예한 통찰이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치열한 공격적 태도가 자본주의의 틀에 부합되는 것은 필연일지 모른다.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말하듯,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 순수한 저항적 체제는 불가능한 허구에 불과하다. 주변 상황에 대해 밀폐된 사유를 전제하는 것 자체가 철학적 오류다. 즉, 예술의 순수한 형식미나 단선적인 저항의 의지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것은 허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순수한 가치와 그를 통한 총체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모더니즘의 신화가 힘을 잃고 진부해진 이후 재전유(détournement)와 같은 창작 방식이 중요해진 이유는 총체적 권력에 대한 비평적 대안의 논리가 전복하려는 권력적 대상의 논리와 일치할 때 도리어 그 허술한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의 그 어떤 순수한 변혁의 의지마저도 차용을 통해 무력화시켜버리는 자본주의의 권력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비평적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걸까.

 

<일시적 기업>은 통상 대기업이 널리 활용하는 가치평가 방식을 그대로 재전유한다. (재전유 그 자체도 자본주의의 문화적 수사다.) 채용공고, 이력서, 면접 등과 같은 장치들이다. 인간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에 따라 재구성하는 이러한 장치들이 위력적인 것은 물론 지극히 제한적이고 획일적인 기준들에 대한 대다수의 동의와 동참, 묵인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차지량이 재전유하는 자본주의의 권력은 바로 묵언의 승인을 창출하는 통제력이다. 실제로 이루어진 구인광고, 전시장에 넘쳐나는 이력서, 대기업의 면접을 모사한 채용 과정은 대기업의 장치를 그대로 반복하며 일종의 자동화된 기계처럼 잠재적 노동력을 한 군데에 집결한다. 미술은 소비다.

 

기업이 요구하는 틀에 기꺼이 개인의 인생을 스스로 약술하게 하는 '이력서'라는 관습은 특정한 언어적 질서를 따르는 약호체계다. ‘장치(dispositif)’다. 종이라는 물질로부터 그 형식과 유통 체계, 그를 통해 재강화되는 가치관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장치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식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력서의 작동 원리는 반복과 차이다. 차이는 노동자의 자본적 가치로 환산된다. 장치는 규격을 만들고 권력을 제조한다.

 

'일시적 기업'에 있어서 이력서라는 장치는 개인적 차이를 노동 가치로 환산하는 대신 무의미한 반복으로 누적시킨다. 이로써 생산이 아닌 불화의 기제를 작동시킨다. 대기업의 가치기준에 대한 불화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에서 보여주듯, 불화의 의지는 집단적으로 반복되지 않고, 개인적 동기를 기반으로 표출된다. 하루 동안 벌어진 대기업에 대한 조직적 테러리즘에 참여한 '일시적 기업'의 직원들은 (그것이 진정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나름 대기업의 문화와 조직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적 동기를 갖고 있다. '일시적 기업'은 결국 기업의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목적의식을 우선하는 기업철학을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각된 개인의 창의성을 회복하기에는 '일시적 기업'의 위력은 지극히 소소하다.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무기와 용기에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소하다. 내면의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길에 나선 테러리스트들이 지닌 무기는 물풍선과 물총, 이력서 따위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질서와 문화에 파괴적인 전복의 힘을 가하려는 의지는 바닥에서 터지는 물풍선처럼 허허하게 흩어진다. 불만과 이의라는 정서 자체가 불균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것의 극단적인 표출은 오히려 그러한 불균형의 상태를 더욱 심화할 뿐이다. 여기에 일시적 기업의 아이러니한 '일시성'이 있다. 지극히 비극적이지만, 결국엔 연극적일 수밖에 없는 정서적 한계가 ‘일시적 기업’의 제한된 범위인 셈이다. 이른바 '관계미술'이라는 레벨로 설명되었던 1990년대의 작품군이 자본주의의 '틈(interstice),' 즉 니콜라 보리오의 주장대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려 했다면, '일시적 기업'은 도리어 대체적 관계의 본질적인 허구성을 비웃는 듯하다. 여기에 건설적, 창의적, 대안적 관계의 창출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나 이상이나 낭만은 없다. '일시적 기업'은 애초부터 연극적이다. 일시적 기업의 일시적 사무 현장을 재현한 일시적 전시장은 무대 세트에 흡사하다. (오프앤프리 영화제에서 상영된) 테러활동의 기록 영상은 머큐멘터리(mockumentary)를 닮았다. 일시적 기업의 일시적 직원이 대기업의 고층건물에 터트리는 화염은 컴퓨터로 처리된 그래픽 효과일 뿐이다. 파괴적 제스처는 혁명운동이 아닌 몽유병 환자의 배회에 가깝다. '일시적 기업'의 반기업 테러리즘은 몽상도 도발도 아닌 중간적 수사로 작동한다. 자위적 환상도 과격한 행동주의도 아닌, 일시적 서사다. 실재와 허구, 현실과 연극 사이에서의 연출된 진동은 스스로의 설득력을 무효화한다. 대기업 문화에 대한 비평적 관점 자체가 텅 빈 메아리처럼 허하게 울린다. 그 허함은 자본주의의 견고함을 고하는 역설이 된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일시적 기업'의 사업이 그 어느 쪽에도 안착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현실과 허구 모두가 자본주의의 견고한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지량은 인터뷰에서 '현실'이나 '청춘'과 같은 개념들이 “기존질서에 의해 이미지로 학습된 언어”라는 점에 대해 경계의 태도를 표명한다. 다매체 프로젝트로서의 <일시적 기업>이 단지 젊은 세대가 체감하는 현실의 단상에 머물 것을 차지량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내년에는 20대 실업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 등에 따라 더욱 어두워지기만 하는 '경제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일시적 기업>은 이를 우려하는 대중매체의 통상적인 담론에 대해서는 예리한 경계를 구축한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체제에 대해 철저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자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해답 없는 현실 속에서 몽환적 제스처는 변혁과 안주의 틈을 넓히기 위한 제식이 된다. 그 제식의 끝에 그 어떤 대체적 태도가 보란 듯이 도래할 것인가는 미지수다. 그 소비될 수 없는 불확실성에 충실하기 위해 <일시적 기업>은 몽상과 도발, 허구와 실재의 간극에서 중간적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리라.

 

채용공고, 이력서, 면접이 그러하듯, <일시적 기업>이 전람되는 미술관이나 영화제 역시 특정한 관습과 질서에 따라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장치들이다. 결코 '일시적'이지 않은 이 장치들의 견고함은 <일시적 기업>의 일시적 수사를 뒷받침하는 메타 형식이 된다. 이것이 '일시적 장치'가 설파하는 모순적 역설이다. 이 역설을 용납할 수 있다면, 모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기업’의 모순과 예술의 역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그 개인적 차이는, 그리고 차이들이 만드는 총체적 불화는, 이력서에 나타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길, 묵묵히 바랄 수밖에 없다. 연극적 동화가 아닌 실재적 불화.

 

서현석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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